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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순희 수필가
마침, 하늘은 온통 인디고블루였다. 짙은 파랑에 회색을 섞어놓은 블루. 파랑에서 파생된 색이라면 그냥 좋은데, 가장 마음 가는 인디고블루라니. 품위를 갖춘 깊은 하늘을 오래오래 바라봤다. 쭈뼛거리던 행동이 단정해지고 물기 없이 흔들리던 방황이 촉촉해졌다. 이제 더는 괜찮은 척, 거짓 표정을 지으며 서성이지 않아도 되겠다. 이제 더는 무심한 척, 여행객인 척, 있는 애정을 숨기지 않아도 되겠다. 인디고블루 하늘은 헐거웠던 감정들을 한곳으로 단단히 묶어주었다.

 마음을 정착시키기까지 7년이 걸렸다. 앞선 호기심을 따라가지 않으려고 애써 외면했던 시간이었다. 생계를 위한 일터와 관련돼 살기 시작한 인천이다. 특별한 연고는 물론이고 어떤 일말의 동경도 없던 도시였다. 대중매체 뉴스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중학생 때부터 굵직굵직한 사건들로 먼저 접한 인천이었다. 그러다 보니 도외시하고 멀리하고 싶은 곳이었다. 이사 와 살면서도 자주 생각했다. 다시 이사 가야지. 금방이라도 떠나기 위해 짐을 늘리지 않았다. 인연을 만들지 않으려고 했다. 그렇게 잠시 들른 손님처럼 7년을 사는 동안 두 아이는 입시를 치렀고 상급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다. 공교롭게도 둘 다 인천 소재 학교이다. 인천에 정 붙이고 오래오래 살라는 운명을 감지했다. 그때에야 비로소 이사하기 버겁도록 불어난 살림들이 눈에 들어왔다. 삶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더니, 보폭이 달라서 데면데면했던 많은 사람들이 이미 내 가슴에 소중하게 자리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동시에 그동안 인천에서 입고 누린 혜택들이 빚으로 살아났다.

 양진채 소설가는 「변사 기담」 작가의 말에서 "인천에 진 빚을 갚기 위해 시작한 장편소설이었다. 빚을 갚기까지 오래 걸렸다"고 피력했다.

 의아했다. 선량하게 사는 한 시민이 고향에 진 빚이란 게 무엇일까. 아니 애초에 그런 게 있을까. 고향은 그냥 고향인, 마냥 기댈 수 있고, 항상 ‘내 편’인 엄마 같은 곳인데 빚이라니. 작가에게 던져진 고향에 대한 부채의식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작가의 말을 인용하자면 나야말로 빚이 많았다. 내 아이들의 입학을 허락해 준 두 학교,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문화와 쾌적한 체험공간, 문학 관련 인연 및 창작기금 수혜 등 여러 혜택을 누리며 살았다. 받은 수혜를 애써 모른 척했던 그 방기야말로 빚이 아닌가. 무엇으로 그 빚에 보답할 것인가. 인천을 배경으로 한 책을 읽으면 조금 갚을 수 있으려나.

 장편소설 「변사 기담」은 무성영화 시절, 연행을 담당한 변사 이야기를 큰 축으로 해서 크고 작은 서사가 촘촘하게 엮여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21세기까지의 시·공간을 넘나드는 긴 여정이다. 변사를 다룬 단순한 서사가 아니라 그 속에는 무성영화와 극장의 역사, 더불어 인천의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나운규의 ‘아리랑’으로 대변되는 무성영화, 일제강점기 일본의 쌀 수탈사건, 독립을 위해 싸운 이름 없는 민초들의 삶, 인천상륙작전 당시 월미도 폭격사건까지 두루 다루고 있다. 이 모든 서사들이 변사 ‘윤기담’과 그가 평생을 바쳐 사랑한 ‘묘화’, 그리고 증손자 ‘정환’을 통해 한 치 어긋남 없이 견고하게 진행된다. 묵직하고 어둡고, 묻혀 있던 소재와 시대상을 작가는 그 특유의 간결하고 힘 있는 문체로 묘사하고 있다. 때론 신파적이고 해학적으로 때론 철학적으로 또 때론 철저히 현실적으로 펼쳐놓으며 흡인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소름끼치도록 치밀한 구성은 모든 서사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힘으로 다가온다. 그 당위성에 이끌려 울고 웃고 먹먹하고 안타깝고 분노를 느끼며 빨려 들어갔다.

 작가를 따라, 윤기담을 따라, 묘화를 따라, 정환을 따라 개항장의 풍물을 구경했고 제물포구락부를 오갔으며, 자유공원을 거닐었다. 그런가 하면 어디에서도 배운 적 없는 월미도 폭격사건의 아픔과 상처를 끌어안아야 했다. 한 권의 소설이지만 그 속에 펼쳐진 인천의 근현대사와 풍경들은 인천을 다각도로 만날 수 있게 해주었다. 인천이 오히려 작가에게 빚을 진 셈이 되었다. 나 역시 빚을 갚기는커녕 빚만 더 늘렸다. 어설프게나마 인천 사람이 된 듯한 뿌듯한 빚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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