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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원옥 시인
언제나 프랑스에 가면 느끼는 것은 도시의 모습이 그리 심하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곳 루앙도 마찬가지여서 30년 전이나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변함이 없다. 이 도시의 중심가인 비유 마르쉐 역시 여전하다. 며칠 전에는 바르비종에 다녀왔다. 프랑스는 늘 그렇듯 우리나라와는 달리 어느 곳이나 그 모습이 그리 변화하지 않는다. 바르비종 역시 당시의 화가들이 사랑한 100여 년 전에 그려진 화폭 속의 풍경 그대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가들의 마을로 불리던 작은 시골, 걸어서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 작고 단아한, 나무꾼들만 사는 이 마을은 한때 내로라하는 화가 코로, 밀레, 루소, 도비니, 뒤프레, 디아즈 등 80여 명이나 모여 살던 곳이다. 그리하여 바르비종은 1830년에서 1870년 사이 근대 화단의 개혁의 현장이 되었다. 르누아르와 모네 등 인상주의 화가들도 이곳을 자주 방문해 그들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이곳에 살며 그림을 그리던 당시의 화가들을 바르비종파라고 부른다. 그 마을 중심 거리에는 밀레기념관과 바르비종파 미술관이 있다. 밀레기념관은 실제 밀레의 주거지 겸 아틀리에였던 작은 2층집으로, 유명한 ‘이삭줍기’와 ‘만종’이 이곳에서 그려졌다. 기념관 안에는 밀레의 유품과 동료들의 작품, 모델들의 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바르비종파 화가들이 자주 모이던 술집은 미술관이 된 것이다.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는 나폴레옹 황제가 퇴위, 엘바 섬으로 유배돼 프랑스가 혼란한 상태에 빠져있던 시기 프랑스 노르망디지역의 그레빌-아그에 있는 작은 마을 그뤼시(Gruchy)에서 출생했다. 19세가 되던 1833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쉘부르의 화가 무셀에게서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게 된다. 2년 후 부친이 사망하자 8형제의 장남으로서의 책임 때문에 고향 그뤼시로 돌아가지만 할머니의 강력한 권유로 다시 쉘부르로 나와 랑글루아 밑에서 그림 공부를 하며 독서에 몰두한다. 1837년 스승 랑글루아의 추천으로 장학금을 받게 되어 파리로 간다. 파리에 가서 들라로슈에게 사사한 이후 콜레지오와 로코코풍의 우아한 파스텔화와 간판그림을 생업으로 삼았다. 1844년 살롱에 농민화를 출품, 1849년 바르비종에 이주해 농민생활을 그렸다. 농민화가로서 입지를 굳히면서, 1857년, ‘이삭줍기’를 살롱에 출품했을 때 ‘하층민의 운명의 세 여신’이라며 비아냥거릴 때 밀레는 "나는 밭 밖에는 본 일이 없기에 내가 본 것을 솔직하게, 그리고 섬세하게 표현하려고 했을 뿐이다"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 무렵부터 밀레의 명성도 확고해지면서 그림도 팔리기 시작했고 ‘만종’, ‘양치기 소녀’ 등 불후의 명작들을 제작한다. 이렇듯 만년의 약 10년간은 사회적으로 신임을 받기도 했으며 1868년 ‘레종도뇌르’훈장을 수상하고 1870년 파리 살롱의 심의위원에 추대되기도 했지만 건강이 악화돼 루소의 무덤 옆에 나란히 묻힌다.

예술가들의 작은 마을 바르비종을 수십 년 만에 다시 와서 보니 감회가 새롭다. 예술품이란 이렇게 오래 남아 그것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을 주니 위대하다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의 그림 ‘만종’은 할머니가 어려서 잃어버린 아들을 생각하면서 들에서 일하다 저녁종이 울리면 늘 기도를 했다고 하는데 그때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그린 그림이라 한다. 그림을 그린 동기는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가 지금 여기 서서 보는 저 그림은 들에서 일하고 저녁에 하루치의 양식을 허락해주신 신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모습으로 비친다. 아무튼 우리는 살면서 하루치의 행복을 부여받은 것에 감사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바르비종을 뒤로 하고 돌아오면서 고난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오직 화가로서의 길을 놓지 않고 살아온 그의 업적으로 인해, 그는 이미 갔지만 영혼은 그가 남긴 작품 속에 영원히 살아 있어 후세인 우리가 감동을 하고 마음을 정갈하게 추스르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이란 영원한 것이라 말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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