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1301010004736.jpg

‘저녁이 있는 삶’과 ‘저녁값을 벌고 싶은 삶’ 사이에서 우리 세계는 여전히 방황하고 있다. 아이와 부모가 함께 보내는 저녁시간은 당연한 일상이어야 하지만 따로 보내는 것이 보편적인 양상이 돼 버렸다. 결국 삶의 질 문제로 귀결되는 현실의 행복은 그 어떤 정책이 시행된다 하더라도 경제적 안정이 보장되지 않는 한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 한 가정의 행복뿐 아니라 인류의 안락한 미래까지 보장해 주는 마법과도 같은 해결책을 제시하는 영화가 있다. ‘다운사이징’ 수술을 받으면 천국이 눈앞에 펼쳐질 거라 장담하는 사람들. 영화 ‘다운사이징’을 통해 우리의 오늘을 되짚어 보자.

 외과의를 꿈꾸던 폴은 병환 중인 어머니를 돌보느라 재활치료사의 길을 택하게 된다. 결혼 후에도 평생을 살아온 오래된 집에서 생활하는 그의 삶은 여전히 팍팍하다. 이제 겨우 학자금 대출을 상환한 그에게 넓고 쾌적한 주거환경을 꿈꾸는 아내의 바람은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이처럼 여유 없는 삶을 사는 폴을 솔깃하게 만든 제안은 바로 신체를 축소하는 다운사이징이었다. 본래 이 첨단기술은 인구과잉으로 인한 환경 파괴와 자원 고갈 등 당면한 미래의 시급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하지만 과학자의 인류애적 의도와는 달리 일반인에게 다운사이징은 윤택한 삶으로 리셋할 수 있는 탈출구로 인식됐다. 신체가 13㎝로 작아진 만큼 소비에 필요한 재화가 줄어들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생활비에 여유가 생긴다는 것이다. 즉, 현실의 1억 원은 소인이 된 후 100억 원 이상의 효용가치가 있으니 다운사이징을 마다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선택한 새 삶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러나 상상했던 모습과는 어딘가 많이 다르다.

 영화 ‘다운사이징’은 사람을 축소한다는 재미있는 발상 속에 시대의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국가적으로 봤을 때 저출산은 심각한 이슈로 대두되고 있지만 지구적 차원에서 인구과잉은 환경과 자원 문제를 양산하고 있다. 영화는 그런 문제점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이기적인 인류는 부유한 삶에 대한 로망으로 이를 산업화하고, 이는 또 다른 자본주의 비즈니스로 전락하게 된다. 그 뿐만 아니라 반인륜적이고 불법적인 시술로 인한 폐해도 나타나게 되면서 여러 부작용이 동반된다. 이처럼 영화는 방대한 스펙트럼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신선한 소재에 비해 지나치게 늘어지고 산만한 느낌을 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주인공 폴에게 집중하다 보면 행복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순환하게 된다.

 다운사이징을 선택한 이유는 행복이었지만 여전히 행복하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폴은 또 다른 도피를 행복의 입구로 생각하지만 우리는 어렴풋이 알게 된다. 회피를 통한 환경의 변화가 행복을 담보하지 않음을 말이다. 이 작품은 결국 생각과 관점의 변화로 강 같은 평화와 행복을 맛보는 듯한 주인공의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어쩌면 구태의연한 이 결론보다 더 좋은 해결책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비현실과는 다른 현실의 무게가 무겁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