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산가족과 실향민이 모여 사는 인천시 동구 만석동 괭이부리마을 전경.   <인천 동구청 제공>
▲ 이산가족과 실향민이 모여 사는 인천시 동구 만석동 괭이부리마을 전경. <인천 동구청 제공>
"세월이 흘러도 너무 많이 흘렀어. 하지만 이번 회담이 좋은 결과로 이어져 후손만이라도 편하게 살면 바랄 게 없겠어."

온 겨레의 기대와 관심이 쏠리고 있는 남북 정상회담을 하루 앞둔 26일 인천시 동구 만석동 괭이부리마을에서 만난 최혜숙(83)할머니는 실향민이다. 이미 얼굴에 주름이 한가득이지만 오랜만에 통일에 대한 기대로 주름이 펴지게 활짝 웃어 보인다. 반세기를 넘긴 세월의 기다림 속에 늙고 지쳐 체념한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말투 하나하나에는 기대감이 그대로 묻어났다.

인천지역의 대표적 실향민촌으로 알려진 괭이부리마을. 이곳에 사는 많은 70~80대 할머니들은 동족 간 참혹한 이념 전쟁이 시작되자 고향을 떠나 이곳에 터를 잡았다. 일주일만 있으면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잠시 머무르려 했지만 그게 마지막이었다. 이들은 언젠가 길이 열리면 가장 먼저 달려가겠다고 판자와 천막, 조개껍질, 진흙으로 얼기설기 집을 짓고 귀향의 희망을 품고 살았다. 이렇게 정착한 만석동은 실향민들의 집성촌이 됐고, 한 집 건너 실향민 또는 이산가족이 둥지를 틀었다. 지금은 많은 이들이 세상을 등지거나 자식들을 따라 다른 곳으로 옮겨 갔지만 수십 명의 노인들은 여전히 제2의 고향인 괭이부리마을을 지키고 있다.

최 할머니는 황해도 옹진군이 고향이다. 황해도 옹진군 양암리에서 태어나 전쟁을 피해 여동생과 함께 월남한 최 할머니는 이곳에 정착한 후 단순 노동부터 해산물 손질 등 안 해 본 일 없이 가난과 싸웠다. 굽은 허리와 휘어진 다리는 고단한 세월의 흔적이 묻어난다. 80을 넘긴 할머니는 아직도 부모님과 고향만 생각하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어떤 말들이 회담에서 오갈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살이 얼마 남지 않은 실향민, 이산가족 1세대의 눈물을 조금이라도 닦아 줄 수 있는 합의가 이뤄졌으면 여한이 없겠어. 이북에 두고 온 부모님은 지금 모두 돌아가셨겠지만 묘를 찾아 술 한 잔이라도 올리고 싶은 마음이지."

황해도 해주시에서 태어나 자란 김합수(88)할아버지는 공산당의 숙청을 피해 부모와 함께 인천으로 월남했다.

"괭이부리마을에는 북한에 부모나 형제, 친지를 두고 온 분들이 많아. 특히 황해도 출신들이 많은데, 나를 포함한 주민들은 이번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북에 두고 온 혈육의 생사라도 확인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지."

황해도 장연군 몽금포가 고향인 김봉덕(72)할머니는 6남매 중 셋째다. 할머니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모의 품에 안겨 형제들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부모님도 그렇고 북에 남아 계셨던 친척들도 이제는 다 돌아가셨을 거야. 너무 어렸을 때 피난 와서 고향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지만, 기회가 된다면 꼭 내가 태어난 곳을 다시 한 번 가 보고 싶어."

인천의 대표 피난민촌인 만석동 괭이부리마을이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설레기 시작했다.

이병기 기자 rove0524@kihoilbo.co.kr

우제성 기자 wjs@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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