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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한 해가 저물어갑니다. 한 해를 살아오면서 얼마나 진실한 사랑을 나누며 살았는지 저 자신을 되돌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내 부끄러워집니다. 사랑은 서로가 서로의 부족함을 알고, 그 부족함을 채워주는 겁니다. 채워줄 때는 ‘나’를 드러내지 않아야 ‘너’의 자존심을 지켜줄 수 있겠지요.

 이처럼 교만하지 않은 사랑이 진실한 사랑일 텐데 저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참 많았습니다. 인터넷에 올라온 글 중에 세계적인 테너 두 사람의 진실한 사랑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플라시도 도밍고와 호세 카레라스입니다. 두 사람은 스페인의 마드리드와 카탈로니아 출신인데, 이 두 지역은 역사적으로 적대적인 관계였습니다. 이런 이유만으로 두 사람은 서로를 냉대하며 한 번도 함께 노래를 부른 적이 없었습니다.

 1987년 카레라스가 급성백혈병에 걸려 투병 생활을 했고, 결국 항암치료와 골수이식 등으로 전 재산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치료를 포기한 어느 날 반가운 소식을 접했습니다. 마드리드에 ‘에르모사’라는 재단이 생겼고, 그곳에 백혈병 전문병원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무료로 치료를 받고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그후 그는 무대에 다시 설 수 있었고, 예전의 명성을 되찾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카레라스는 그 재단의 설립자가 경쟁자인 도밍고라는 것을 알고는 놀랐습니다. 더 놀란 것은 도밍고가 자신의 치료를 위해 재단을 설립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자신의 자존심을 구기지 않기 위해 익명으로 설립했다는 것을 알고는 그에 대한 감사함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도밍고가 공연을 하고 있는 극장으로 찾아간 카레라스는 공연을 중단시키고는 무대로 올라갔습니다. 공연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긴장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카레라스는 관객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무릎을 꿇었습니다. 도밍고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 겁니다. 너무도 놀라고 당황한 도밍고는 그를 일으켜 세운 뒤 힘껏 포옹했습니다. 적이 벗으로 바뀌는 감격의 순간이었습니다. 도밍고와 카레라스의 벗이 되는 그 장면에서 모든 관객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기립 박수를 쳤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기자들이 며칠 후 도밍고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왜 경쟁자인 카레라스를 도우셨나요?"

 도밍고는 담담한 어조로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저는 카레라스의 목소리를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두 사람입니다. 적으로 여긴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익명으로 재단을 만든 도밍고, 그리고 자존심을 모두 내려놓은 채 무릎을 꿇고 감사의 마음을 전한 카레라스, 이 두 사람의 이야기에서 어떻게 사랑하는 것이 진실한 사랑인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사랑이 주는 위대함은 그 사랑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카레라스는 2008년에 백혈병에서 완전히 회복된 후 자신도 백혈병 재단을 설립하고, 환자들을 위한 수많은 자선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그의 콘서트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용기를 내고 희망을 갖게 됐을 겁니다. 감동은 이렇게 또 다른 감동을 낳습니다.

 「바보 되어주기」라는 책에 볼펜과 몽당연필이 나누는 대화가 나옵니다. 이 대화에서 우리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약이 닳아 못 쓰게 된 볼펜이 "이젠 아무도 날 거들떠보지도 않는군"이라며 탄식합니다. 이를 지켜보던 몽당연필도 "나도 한때는 열심히 쓰였는데"라며 거듭니다. 둘은 이제 천덕꾸러기가 된 겁니다. 문득 슬픔이 밀려옵니다. 그때였습니다. 누군가가 오더니 볼펜머리를 돌리고 볼펜심을 뺀 후 그곳에 몽당연필을 끼웁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제 잘 써지지?"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진실한 사랑은 쓸모없던 ‘나’를 쓸모 있는 ‘나’로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새해에는 이런 사랑이 조금 더 많은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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