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수부두는 한때 인천지역을 대표하는 어항(漁港)이었다. 부두의 배후주거지였던 마을은 수산업 호황과 주변 공장들로 한때 사람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점차 쇠락의 길을 걸으며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다. 지금 이곳은 옛 명성을 찾고자 한다. ‘다시, 꽃을 피우는’ 곳으로 거듭나고자 한다. 화수정원마을 주민들을 만나 삶의 애환과 미래 모습을 그려 봤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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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에 이곳은 서로 간에 정도 있고 정말 재미있게 살기 좋았지. 전쟁이 끝나고 마을에 사람이 모이기 시작하던 초창기에는 꿀꿀이죽도 없어서 못 먹을 정도였지. 하지만 사람 사는 풍경 안에 활력이 느껴졌다고. 그런데 지금은 아이들 보기가 힘들 정도로 삭막해."

 무술년(戊戌年) 한 해가 저무는 지난달 10일 오전 동구 화수2동 행정복지센터에서 4명의 화수정원마을 주민들을 만났다. 조등부(73)·최명수(70)·최광수(63)·이가영(60·여)씨는 자신들이 마을에 정착하던 시절을 그리며 사람 사는 냄새가 나던 모습을 떠올렸다. 잠시 감회에 잠긴 모습이다.

 조등부 씨는 1958년 충청남도 서천에서 화수부두의 명성을 듣고 올라와 마을에 정착했다. 먹고살기 힘든 시절, 인천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주변의 얘기를 듣고 어머니와 이사했다. 조 씨는 "서천 시골에 살다가 인천에 가면 돈 번다고 해서 왔다"며 "사실 겨우겨우 먹고살았지만 그때는 대부분의 고깃배들이 이쪽으로 들어와 물건을 풀던 시절이라 꽤 많은 돈이 돌던 곳이었다"고 회상한다. "튀김 장사도 했고, 자전거로 막걸리 배달도 했다"며 젊은 시절을 떠올렸다.

 그는 1969년부터 시작한 막걸리 배달로 마을에서 기반을 잡을 수 있었다. 양조장 공판장에서 술을 받아 인근의 월미도·신포동·동인천 비포장도로에서 열심히 페달을 밟으며 생계를 꾸렸다. 22세 청년시절에 만난 부인은 만석동 동일방직공장에 다니던 여공이었다. 동일방직공장은 현재 물류창고로만 남아 있지만 1980년대 여성 노동운동사의 한 획을 그은 투쟁의 현장이었다.

 화수정원마을에서 이어진 인연으로 조 씨는 집안의 대를 이을 수 있었다. "각시가 공장에 다니면서 우리집에 세를 들어 살았는데, 예뻐서 자꾸 눈이 가더라고. 그래서 데리고 살았지. 같이 살면서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막내딸이 장애가 심해 태어나서 아직 한 번도 바닥에 발을 못 디뎠어. 그런 아픔도 있지만 정이 든 동네를 떠날 생각은 해 보지 않았어."

 이날 만난 4명의 주민 중 동네에서 가장 오래 산 이는 최광수 씨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최 씨의 부모는 황해도 해주에서 배를 타고 목표까지 피난을 나섰다. 전쟁이 끝날 것 같다는 소식에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휴전선이 생겨 화수정원마을에 정착했다. 최 씨는 마을의 번영기와 쇠락기를 모두 겪었다.

 "전쟁이 끝난 당시에는 행정기관에서 빈 땅 아무 곳에나 집을 짓고 살게 해 줬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부모님이 여기 자리 잡으셨대요. 그렇게 이 동네에서 태어나서 어릴 때 바닷가가 좋아 팬티바람에 수영하러 다녔죠. 그때 이곳은 엄청 번화해서 먹고사는 건 걱정 없었죠. 화수부두로 고깃배들이 들어오고, 기계 공장도 많았고. 인천에서 가장 번화가였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제는 이 동네가, 크게 봐도 동구가 가장 낙후됐죠."

 최명수·이가영 씨는 마을에서 30년 동안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부부다. 남편 최 씨 역시 피난이 마을에 정착하게 된 이유다. 최 씨는 "부모님이 이북에서 덕적도로 피난을 나왔다가 동구 송현동에 자리잡았다"며 "초등학교를 졸업할 시기에 아버지가 이 마을에 시계방을 차리면서 이사를 오게 됐다"고 말했다. "지금 화도진공원 자리에 성냥·바늘·라이터 공장 등이 있어서 사람이 많았다"고 덧붙였다.

 최 씨는 생계를 위해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공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대부분의 집들은 꿀꿀이죽을 먹었다"며 "미군 부대에서 먹던 것을 추려 큰 가마솥에 끓인 것인데, 그것도 없어서 못 먹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최 씨의 말이 끝나자 옆에 있던 부인 이가영 씨가 거들었다.

 "저는 서울 태생인데, 제가 살던 동네보다 더 발전할 거라는 얘기에 속아서 왔어요. 그래서 10년 정도 흐르면 발전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점점 관심 밖의 동네가 돼 가네요. 1980년대 초반에 남편을 따라 이곳에 왔지만 크게 변한 게 없는 동네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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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수정원마을은 도시재생사업 지구에 선정됐다. 이들에게 마을이 사업으로 어떻게 바뀌었으면 하는지 물었다. 화두는 소음·날림먼지 등 주거환경 개선이다. 낙후된 주거환경 개선이 선행돼야 학생들과 신혼부부 등의 젊은 층이 유입되고 마을에 새로운 활력이 돌 것이라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최명수·이가영 씨 부부는 소음과 먼지로 인한 피해를 호소했다. "대형 트럭들이 집 앞 도로로 다녀 창문을 못 열어요. 밤낮 가릴 것 없이 대형 차량들이 지나가는데, 하인천 쪽에서 배가 들어오면 밤새 트럭이 고철을 날라요. 소음이면 소음, 먼지면 먼지 말도 못합니다. 차를 세워 놓으면 먼지가 하얗게 쌓이죠. 방음벽이 세워지길 원해요."

 이 씨는 이러한 먼지 문제로 볕이 좋은 날에도 빨래를 밖에 널 수 없다고 토로했다. 도로변에 인도가 없어 불법 주정차도 극심하다고 했다. "언제부터인가 택시들이 집 앞에서 쉬고 갑니다. 인도가 없으니 집 앞에 바짝 차를 대면 도로를 달리는 차들을 피해 주차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죠. 평일 근처에 있는 대기업 D사 차량들도 주차공간이 적어 동네에다가 주차를 하고 가요. 동네 주민들을 위한 배려가 필요합니다."

 최광수 씨도 거들었다. 그는 "구청 등에 완충녹지를 만들어 달라고 수차례 요구했지만 교통법 등을 내세우면서 어렵다고만 했다"며 "먼지가 말도 못한다"고 토로했다. "그래서 이사 온 사람들 중 단순히 먼지 문제만으로 동네를 떠난 경우도 부지기수"라고 덧붙였다.

 주민들은 기본적인 생활권이 개선되길 원했다. 이를 통해 새 활력을 찾고 싶어 했다. 다시 태어날 마을 터 안의 7통 200여 가구 중 올해 취학통지서를 받은 가구는 3곳뿐이다. 주민들은 통지서 3개도 최근 몇 년에 비해 많은 수치라고 했다. 주민들은 젊은 부부들이 이곳에서 자녀 교육 등에 기대할 부분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가영 씨는 "마을까지 들어오는 버스 노선이 하나인데, 그마저도 동네 중심부까지는 10∼15분을 걸어 들어와야 한다"며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기도 꺼려지는 환경이고, 동네 안에 제대로 된 학원 하나 찾아볼 수 없으니 젊은 층이 무엇을 기대하고 동네에 정착하겠느냐"며 한숨을 쉬었다.

  장원석 인턴기자 stone@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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