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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어린 시절, 할머니 댁에 간 적이 있습니다. 저녁 늦게까지 아이들과 놀다가 잠이 들었는데, 새벽에 소변이 마려워 깼습니다. 화장실에 가려면 마당을 가로질러야만 했습니다. 무서웠지만 그래도 참을 수가 없어서 나갔습니다. 그날 따라 달빛이 제법 길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화장실 옆에는 그리 높지 않은 나무가 있었는데, 나뭇가지에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마치 하얀 뱀이 움직이는 듯이 말입니다. 너무 놀라 얼른 방으로 돌아와 고통스럽게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날이 밝아져서 마당에 나가보니, 그것은 뱀이 아니라 전날 밤에 아이들과 화장지를 던지며 놀다가 화장지가 나뭇가지에 걸렸던 겁니다.

 저는 화장지를 ‘뱀’이라고 판단했고, 그 판단이 ‘두려움’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왜곡된 마음이 빚어내는 것을 ‘사실’이라고 ‘판단’하고, 그 판단에 의존해 온갖 감정을 느끼곤 합니다. 이것을 ‘마음의 장난’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면 이렇게 불안감과 두려움에 휩싸인 채로 살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래서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많은 다툼들이 자신의 ‘판단’만을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요.

 평생을 수행한 달마대사도 마음이 빚어내는 고약함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음, 마음, 마음이여! 도대체가 속을 알 수 없는 놈. 기분이 좋으면 온 세상을 제 몸 아끼듯 포용하다가도, 한번 삐치면 바늘 하나 꽂을 자리조차 남에게 양보하지 않으니!"

 「장자」와 「열자」에 조삼모사(朝三暮四)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이것이 우리의 마음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송나라에 저공이라는 사람은 원숭이를 좋아해서 여러 마리를 길렀습니다. 어느 날, 저공이 원숭이들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도토리 세 개를 주고, 저녁에 네 개를 주마."

 이 말을 들은 원숭이들이 화를 내자, 저공이 "그렇다면 아침에 네 개를 주고 저녁에 세 개를 주마"라고 말하니까, 그제야 원숭이들은 박수를 치며 좋아했습니다.

 하루에 먹을 도토리는 모두 일곱 개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망각하고 지금 당장 하나를 더 먹으려는 마음이 곧 우리의 마음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속상해하고 그래서 불평을 터뜨리곤 합니다. 네 개를 준다는 말에 기뻐하고, 세 개를 준다는 말에는 분노하는 마음이 곧 ‘나’의 마음이고, 그것이 마음의 장난임을 직시할 수만 있다면 평온하게 살 수 있을 겁니다.

 어느 스님의 강연에서 들은 이야기 하나가 떠오릅니다. 신혼부부가 식사를 마치고 아파트 뒤쪽에 있는 산책로를 걸었습니다. 조금 걷다 보니 산책로 옆 호수에서 ‘꽥꽥!’ 소리가 납니다. 평소 고집이 센 아내가 "이 시간에 웬 닭소리야?"라고 물었습니다. 남편은 "저게 왜 닭소리야? 오리소리지"라고 답했습니다. 그때부터 부부는 다투기 시작했고 시간이 갈수록 언성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이윽고 아내는 울기 시작합니다.

 신혼부부의 산책로 사랑은 ‘꽥꽥’ 소리 때문에 처참하게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본질이 망각되는 순간 곁가지들이 본질의 자리를 채우게 됩니다. 바로 ‘옳고 그름’이라는 분별심이 그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판단’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때문에 싸웁니다. 그래서 자신의 곁에 와 있는 행복마저도 차버리기 일쑤입니다. 바로 마음의 장난에 휘둘린 삶의 결과입니다.

 ‘꽥꽥’ 소리가 ‘닭’이면 어떻고 ‘오리’면 어떻습니까. 그저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면 안 될까요.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아내에게 "그것은 오리였어"라고 가르쳐줘도 되지 않을까요. ‘조삼모사’이면 어떻고 ‘조사모삼’이면 어떻습니까. 분별의 끝은 다툼이고 서로를 적으로 만들어버리기 일쑤입니다. 그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 조금은 더 기다리면서 관찰하는 태도가 행복을 부르는 길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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