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슥슥 삭삭.’ 30㎡ 남짓한 공간을 가위질 소리가 메우기 시작한다. 머리카락을 한 움큼 부드럽게 쥐고 빗 모양에 맞춰 가위로 잘라내는 손이 분주하다. 이용사에게 온전히 자신의 머리카락을 맡긴 손님은 편한 손길에 눈을 감고 여유를 즐긴다. 제법 길이감이 있던 머리카락은 금세 단정한 길이로 정돈된다. 손님의 머리 모양을 이리저리 살핀 이용사는 곧 가위를 내려두고 이용용 칼을 집어 든다. 요즘은 보기 힘든 이용용 칼이 귀 뒤부터 구레나룻, 목 부근까지 거침없이 잔머리를 정리해 나간다. 다시 한 번 거울로 손님의 머리 매무새를 확인한 이용사는 "다 됐다"며 손님의 몸을 감싸고 있던 가운을 벗긴다. 마침내 눈을 뜨고 이용사와 똑같이 거울을 들여다본 손님은 만족감에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인다. 익숙한 듯 이용사에게 돈을 건네고 "또 오겠노라"고 말하는 손님의 표정이 밝다. 이용사도 단골 손님을 배웅하며 "잘 가라"고 웃는다.

 해방 직후부터 줄곧 문학동을 지킨 ‘문학이용원’의 평범한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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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문용 문학이용원 사장이 지난 29일 인천시 미추홀구 문학동의 이용원에서 자신이 쓰는 가위와 빗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 문학이용원의 시작

 1945년 인천시 미추홀구 문학경로당 인근에는 작은 이용원이 하나 들어섰다. 인천시내에서 이용업 일을 하던 박경산(1905~1964)사장이 해방 후 정식으로 창업한 이용원이었다. 당시 이름은 단순히 읍내에 있어 ‘읍내이발관’이었다.

 당시 문학동은 아직 개발이 되지 않아 논과 밭이 펼쳐진 동네였다. 이용원 인근에 가구 수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곳에 사는 온 주민이 읍내이발관 손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주민들은 머리를 하러 왔다가 우연히 반가운 이웃을 만나 이야기꽃을 피우기 일쑤였고, 개구쟁이 남학생들은 "머리카락을 자를 때는 움직이지 말라"며 박경산 사장에게 꿀밤을 맞기도 했다.


 읍내이발관과 같은 해 태어난 박문용(74)사장에게도 이 풍경이 익숙하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 박경산 사장을 도와 이곳에서 이용기술을 익히기 시작해서다. 박문용 사장은 별다른 이용교육을 받지 않고 아버지를 통해서만 기술을 전수받았다. 이 때문에 박문용 사장에게는 손님을 대하는 것이 연습이자 실전이었다.

 "사실 나는 비교적 편하게 이용기술을 배운 거야. 이용원을 찾아오는 손님들이 모두 아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실수를 해도 손님들이 다 이해해 줬거든. 칼질이 익지 않아 손을 베이기도 많이 베였고, 주문한 길이보다 더 짧게 잘라서 난감한 적도 있었어. 그때마다 손님들은 배울 땐 다 그런 거라고, 괜찮으니까 얼른 배워서 멋지게 깎아 달라고 말하며 웃어 줬지."

 그랬던 박문용 사장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읍내이발관을 운영하기까지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1964년 박경산 사장의 별세 당시 박문용 사장은 채 성인이 되지 않은 19세 소년이었다. 학업도 마치지 않은 상태에서 아버지의 손님들을 그대로 받다 보니 어느새 가업으로 잇게 됐다.

▲ 박문용 문학이용원 사장
 박문용 사장이 군대에 가 있는 3년여간 잠시 다른 사람의 손에 맡겨졌던 이용원은 박문용 사장이 제대한 1969년 다시 문을 열었다. 이름은 이전과 같이 읍내이발관이었다. 그러다 30여 년 전 지금의 자리로 옮겨와 정식으로 터를 잡았다. 또 "읍내이발관은 너무 시골 가게 같은 이름이니 문학이용원으로 바꾸면 어떻겠느냐"는 단골 손님들의 권유로 간판도 바꿔 달았다. 30여 년간 한결같이 지금의 자리를 지켜온 문학이용원의 시작이다.

# 같은 추억을 공유하는 단골 손님들

 문학이용원 손님들은 대부분 읍내이발관이었을 때부터 다닌 단골 손님들이다. 과거 논밭이었던 문학동 인근이 점차 개발되면서 동네 사람들도 하나둘 마을을 떠났지만, 머리 손질만큼은 잊지 않고 문학이용원을 애용한다. 먼 곳에서도 찾아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단골 손님들에게 박문용 사장은 그저 고마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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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자격증을 얻기 위해 봤다는 오래된 책.
 "아버지의 손님들 중 당시 학생이던 친구들도 있다 보니 보통 손님들이 50세 이상이야. 아직도 정정하신 80세 이상 손님들도 오시고, 대부분 예전부터 이곳만 찾아주신 분들이지. 단골 손님들이 오면 내가 머리를 손질하는 동안 아버지 얘기, 예전 동네 얘기 등 추억을 꺼내느라 바빠. 우리 아버지가 짓궂으신 면이 있어서 당시 학생이었던 손님들한테 특히 장난도 많이 치고 그러셨다고. 단골 손님이 오면 오랜만에 아버지에 대한 얘기도 듣고 옛 기억을 돌아볼 수 있어서 나한테도 의미가 있는 시간이야."

 수십 년 전 1천500원이었던 이발 가격은 어느새 1만 원으로 오를 정도로 시간이 흘렀다. 아버지 대신 조심스럽게 손님들의 머리를 매만지던 소년은 손 감각만으로 능숙하게 머리를 다듬는 베테랑 이용사가 됐다. 손님이자 옛 이웃사촌, 친구이자 든든한 지원자들 덕분에 하루 15명 정도 되는 손님을 받아도 끄떡없다.

 "처음 아버지 없이 혼자 이용원을 시작했을 때는 혹시라도 실수할까 걱정돼서 낯선 손님들을 돌려보내기도 했어. 실수해도 이해해 주실 만큼 내가 잘 아는 손님들만 받았던 거야. 그때마다 손님들은 머리카락을 잘못 잘라도 괜찮다며 웃어 줬어. 덕분에 실력도 금세 늘었고, 지금은 그분들이 오히려 나한테 오래오래 이용원을 하라고 얘기하곤 해. 여기 아니면 어디 머리 할 데가 없다고 말야. 농담 삼아 자신들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용원을 하라고 하더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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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문용 사장이 단골손님의 머리를 자르고 있다.
# 사양길에도 묵묵히 그 자리에

 최근 이용원은 미용실 등 신식 기술을 갖춘 가게에 밀려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다. 남성들도 이발소보다는 미용실을 찾는 경우가 많다. 한창 때 미추홀구에만 300개 가까이 됐던 이용원은 어느새 절반 이상 줄어 120여 곳만 남았다. 박문용 사장은 1년에 한 번 정기적으로 이용사교육을 받으러 갈 때마다 줄어드는 인원을 보면서 이용원이 사양직종이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고 했다.

 "최근 이용기술을 배우려는 사람도 없는 상황이라 이용원이 많이 사라지고 있어. 새로 기술을 배우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젊어 봐야 60대거든. 젊은이들은 면도나 이발보다는 미용실 식으로 배우곤 하지.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이용기술은 가르치는 곳도, 배우는 사람도 줄어드는 거야. 나 역시 아버지 밑에서 배운 게 이 기술이라 이용원을 시작하긴 했지만 요즘 추세를 보면 마음이 착잡할 때가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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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용문 사장이 사용하는 가위들.
 이제 박문용 사장의 바람은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문학이용원에서 손님들을 만나는 것이다.

 박문용 사장에게는 아들 둘이 있지만 각자 다른 직업을 선택해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문학이용원을 잇게 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는 "오래도록 찾아오며 문학이용원을 있게 한 손님들에게는 감사한 마음뿐이고, 덕분에 생활에 무리가 없을 정도"라며 "이곳을 인수받거나 이용기술을 배울 만한 사람이 없어 걱정은 되지만, 일단은 손이 무뎌지지 않을 때까지는 문학이용원을 계속 이어가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김희연 기자 khy@kihoilbo.co.kr

사진=이진우 기자 ljw@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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