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은 유난히도 추웠다. 창밖에는 두꺼운 겨울 외투를 걸친 사람들이 발길을 재촉한다. 저마다 입김을 내뿜으며 곧 사라진다. 인천시 부평구 ‘남창문구백화점’의 바깥 풍경은 늘 그랬다. 1945년 문을 연 이후 반세기가 지나도록…. 그리고 오늘 아침도 어김없이 출근한 사장님은 청소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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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광자 남창문구사 사장이 지난 7일 인천시 부평구 남창문구사 매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사연이 깊은 ‘공책’이 전하는 ‘남창문구백화점’ 얘기

 아침마다 그를 만난 지 벌써 50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나는 친구들이 아주 많습니다. 정확히 세어 보진 못했지만 거의 3만 명이 넘는 친구가 이곳 ‘남창문구백화점’에 있습니다.

 예전에는 나와 몇몇 친구들밖에 없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늘어나다 보니 지금은 손님들이 우리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각자의 자리가 정해져 있습니다. 출입구 바로 앞에 있는 1번 자리에는 각종 펜 친구들이 있고 2번에는 스티커들, 3번 연필깎이, 4번 장기, 5번 선물함, 6번 줄넘기와 풀, 7번 편지지와 다이어리, 8번 색연필, 9번 물감, 그리고 마지막인 20번에는 새하얀 실내화들이 각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2번과 14번에 나눠져 있습니다. 크기별로 쓰임새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침마다 우리를 청소해 주는 분은 사실 작은 사장님입니다. 우리를 처음 세상에 꺼내 놓은 분은 지금 사장님의 시아버지인 고(故) 임덕용 사장님이거든요.

 임덕용 사장님은 충청북도 충주가 고향입니다. 젊었을 때 충주군 양성면의 한 금광에서 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갱이 무너졌고, 3일 만에 구사일생으로 구조됐다고 해요. 유독 그날은 어떤 사람이 큰 사장님의 줄을 새치기했는데, 갱이 무너지면서 새치기한 사람까지 목숨을 잃었다고 해요. 그래서인지 큰 사장님은 작은 사장님에게 새치기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금광에서 목숨을 건진 큰 사장님은 얼마 후 큰 장마로 집이 떠내려 가는 고난을 겪게 됩니다. 일터와 집을 잃은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서울로 상경하게 되죠. 서울 생활도 쉽지 않았습니다. 겨우 마련한 노잣돈을 작은 사장님 말투로 소위 ‘쓰리(소매치기)’당한 거예요.

 이후 큰 사장님은 한강물을 퍼서 농사를 짓는 데 전달해 주는 일을 했다고 합니다. 하루종일 물레방아를 돌렸지만 쥐꼬리만 한 품삯으로는 허기를 채울 수 없었고, 북어 대가리를 사서 밤새도록 씹으며 잠을 청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후 큰 사장님은 기회가 닿아 지금 가게 옆 동네 있었던 미쓰비시 공장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광복으로 공장이 폐쇄되면서 또다시 직장을 잃었고, 화장품을 팔기로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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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평구 남창문구백화점 전경.
 "먹고살 게 없으니 길에서 화장품 장사를 시작한 거야. 그런데 화장품 장사가 여자를 상대로 하잖아. 하도 말을 많이 하다 보니 일 끝내고 집에 오면 시아버지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고 해. 그만큼 고됐다는 거지. 그래서 물품을 바꿨어. 처음에는 공책을 팔다가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단추, 바늘, 비누 등 잡화를 팔게 된 거야."

 작은 사장이자 큰 사장님의 며느리인 조광자(77)사장이 추억하는 남창문구백화점의 시작이다.

# 피난길에 챙겨 간 ‘공책’, 가족들의 생계수단으로

 다른 친구들도 저마다 사연이 있겠지만 특히 나는 큰 사장님과 인연이 깊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큰 사장님은 당시 자신을 따라 인천으로 올라온 6남매를 데리고 피난길을 떠납니다. 그 정신없는 시기에도 나와 연필 등 몇몇 친구들을 리어카에 싣고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 피난길 대구에 도착한 큰 사장님은 나와 내 친구들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답니다. 가족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였지요.

 1960년대 중·후반에는 내가 창고에 수년 동안 쌓여 있었습니다. 당시는 정찰제가 아니어서 문방구별로 가격이 천차만별이었어요. 큰 사장님은 학기 초가 되면 현금을 싸들고 공장에서 나를 단체로 주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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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창문구백화점 매장에서 손님들이 물건을 고르고 있다.
 예를 들어 도매가가 1권당 12원이라면 손님들에게 14원으로 판매하는 형식이죠. 문방구 사장들끼리 가격을 약속한 거예요. 그런데 경쟁이 치열해지자 일부 문방구들이 마진 없이 12원에 판매하는 경우가 생겼습니다. 우리 큰 사장님은 약속된 가격을 유지하다 보니 물건이 팔리질 않았죠. 재고는 날이 갈수록 쌓이고 생활은 힘들어졌어요.

 그래도 사람이 정직하게 살면 복이 온다던가요. 박정희 정권 당시 석유 파동이 발생하면서 물가가 갑작스럽게 올랐고, 나는 기존보다 더 많은 이윤을 남기고 팔렸습니다. 그때 마련한 종잣돈으로 가게도 확장하는 등 큰 도움이 됐답니다.

# 부잣집 딸내미에서 열정 지닌 문구점 직원으로

 우리 작은 사장님은 인천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입니다. 작은 사장님의 아버님은 부구청장까지 한 인물로 부잣집에서 자란 딸내미였어요. 어른들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한 작은 사장님은 시집 온 이듬해인 1966년부터 큰 사장님과 함께 문방구 일을 보게 됩니다.

 "처음에는 집에서 살림만 했어. 그런데 문구사 직원들이 자주 바뀌는 거야. 직원이 없어서 장사를 하지 못하는 상황까지 되니 내가 나갈 수밖에 없었지. 본격적으로 물건들 가격을 외우고 장사를 도맡아 하게 됐어. 먹고살 게 문구사밖에 없었거든. 창고에 팔리지 않은 가위가 한 상자 있더라고. 기름을 바르고 종이로 닦아 모두 팔았지. 그렇게 재고로 쌓인 물건들을 손질해서 다 처분했어."

 작은 사장님은 열정이 있었습니다. 문구사 일을 시작한 초기, 찾아오는 손님들마다 큰 사장님만 찾으니 오기가 생겼습니다. 저 손님을 자신의 고객으로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을 했죠. 10년 동안 노력하니 그 이후부터는 시아버지가 아닌 자신을 찾는 손님들이 생겨난 겁니다.

 "여름에는 새벽 6시에 문을 열고 밤 11시가 돼야 문을 닫았어. 처음에는 24시간이 부족하니 5시간만 더 달라고 신에게 기도한 적도 있어. 잠자는 시간도 아까웠거든. 아끼고 아껴 조금씩 모으다 보니 처음 있었던 16.5㎡짜리 가게에서 1974년에 지금 이곳으로 옮기게 된 거야. 처음 왔을 때는 크지 않았지. 지금과 같은 공간이 만들어지기까지 50년이란 세월이 흐른 거란다."

 남창문구사는 이제 백화점이라고 불릴 정도로 없는 물품 빼고는 다 있는 곳입니다. 특히 작은 사장님의 고집이 가게를 확장하게 된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손님들이 죄다 서울에 있던 코스모스 백화점으로 갔어. 부평에 사는 학생들이 물건을 사러 서울로 간다는 게 자존심 상했지. 하루는 내가 백화점에 가서 필통이고 뭐고 좋은 것들은 몇 개씩 다 사왔어. 그 물건을 만든 회사들을 찾아 우리도 똑같이 주문했지. 당시 삼고 새마음 노트라고 예쁜 그림이 있는 공책이 있었어. 컬러로 나왔지. 가게에 들여놓으니 학생들이 서울에 가는 대신 우리 가게를 찾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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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광자 사장이 매장에서 상품을 정리하고 있다.
 친구들이 많아지자 손님들도 늘어났습니다. 1천 원 상당을 사도 우리 가게를 찾았죠. 여기에 마진을 적게 하는 작은 사장님의 신조도 단골손님을 만드는 데 한몫했습니다.

 "사명감으로 지금까지 가게를 열고 있는 것 같아. 사람들이 ‘여기는 없는 게 없다’고 말할 때가 가장 기분 좋아. 또 어떤 형제는 자신들이 여기서 산 문구로 열심히 공부해서 박사가 됐다고 말해. 기분 좋지. 이 공책을 가져가서 공부 열심히 해 달라는 마음으로 팔아. 이문이 적어도 좋은 물건을 팔아야 해. 그런 보람으로 꿋꿋이 이어가고 있어."

 작은 사장님은 당신이 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와 함께 있겠다고 합니다. 나도 오래도록 작은 사장님과 함께 있고 싶습니다. 어떤 친구보다도 남창문구백화점과 인연이 깊은 나는 ‘공책’입니다.

  이병기 기자 rove0524@kihoilbo.co.kr

사진=이진우 기자 ljw@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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