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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미 3대 사장이 자신이 운영하는 인천 차이나타운의 중화요릿집 ‘풍미’ 카운터에서 손님들이 지불하고 간 여러 나라의 지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풍미(風味, 음식의 고상한 맛)’를 4대째 이어오는 곳이 있다. 인천시 중구 차이나타운 중화요릿집 풍미(豊美)다. 처음 문을 연 건 지금 사장인 한현수(40)씨의 할아버지다. 현수 씨의 증조할아버지인 봉명 씨는 한국전쟁 이전부터 이 자리에서 ‘동순동(同順東)’이라는 무역회사를 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봉명 씨 아들 성전 씨만 지금의 풍미 자리로 돌아왔다. 이때가 1953년. 한 씨 집안의 중화요릿집이 탄생했다.

 풍미는 현수 씨의 증조할아버지 봉명 씨가 지은 이름이다. ‘풍미가게’, ‘풍미원’, ‘풍미교자관’ 등으로 이름을 바꿨지만 증조부가 이름 지은 ‘풍미’는 버리지 않고 지켰다. 차이나타운에 수많은 중화요릿집이 있지만 풍미는 공화춘에 가장 가까운 집이다. 당시 공화춘과 가장 가깝게 교류한 곳이 풍미였다. 명절 때나 바쁜 날이나 서로 도와주며 지냈다. 자연스레 음식 맛도 비슷해졌다. 서로 앞뒷집이어서 문을 열어 두고 부모 때부터 담을 넘나들며 한 식구처럼 정을 쌓았다. 현수 씨 부모인 정화 씨와 조지미(67)씨는 당시 공화춘인 지금의 짜장면박물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지금 풍미는 3대 사장 조 씨와 4대 사장 현수 씨가 지키고 있다. 조 씨는 부산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피난시절 용두산에서 부모와 같이 살다가 전쟁이 끝나고 전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조 씨 부모는 부산에서, 전주에서 계속 중화요릿집을 했다. 조 씨가 중화요리를 잘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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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즈를 취하고 있는 조지미 사장.
 20대 초반에 조 씨는 시아버지가 하던 식당을 이어받아 1979년 만두와 빵을 주로 팔았다. 인천시청이 중구청 자리에 있을 때다. 주변 학생이 많아 라면도 곧잘 팔렸다. 음식 솜씨가 소문이 나자 단골손님들이 시아버지 때 하던 중화요리를 해 달라고 요구했고, 조 씨는 오향장육과 후추잡채, 물만두를 팔기 시작했다. 후추잡채 등과 빵을 곁들인 메뉴가 불티나게 팔렸다. 맛을 본 사람들은 감탄했고, 이내 또 다른 메뉴를 원했다. 바로 짜장면이었다. 옛 공화춘이 없어진 지금 이 짜장면이 차이나타운에서 가장 오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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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미’ 내부에 걸려 있는 식당의 옛 모습과 가족 사진들.
조 씨는 "중화요리를 팔기 시작할 때는 동네 사람들이 서울로, 미국으로 떠나 한참 동안 동네에 생기가 없었다"며 "중화요릿집도 지금처럼 많지 않았고 사람들이 도와줘 요리가 즐거웠다"고 말했다. 하루 1만∼2만 원씩 팔 때지만 흥겹게 중화요릿집을 운영했다. 이 때 조 씨는 가계부에 목욕비, 이발비까지 쓴 걸로 기억하는데, 한 달에 100만 원을 손에 쥐면 매우 기뻤다고 회상했다. 조 씨가 중화요릿집을 시작할 때는 차이나타운에 가정집이 대부분이었다. 이 가정집이 지금은 거의 중화요릿집으로 바뀌었다.

 풍미의 주 메뉴는 팔진주주. 동파육 고기에 해물이 덮여 있어 저녁시간 술을 곁들이는 손님들에게 인기 만점이다. 표고버섯으로 요리한 소향동구도 마찬가지다. 이 맛은 미국 애틀랜타에도 전파됐다. 조 씨의 지인이 중화요릿집을 애틀랜타에 냈다. 이름도 빌려 갔다. 풍미 애틀랜타점이 생겼다. 이곳도 장사가 잘 돼 조 씨에게 고마움을 표한단다.

 풍미의 가장 좋은 점은 코스요리를 손님 입맛에 맞게 바꿔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소향동구를 좋아하는 손님이면 다른 요리를 빼고 소향동구를 더 준비해 준다. 이렇다 보니 손님이 손님을 데리고 온다. 요즘은 아주 어려서 풍미를 다니던 손님들이 자주 찾아온다. 조 씨는 이럴 때 매우 기쁘다. 보람도 느낀다.

 조 씨는 "이름은 말할 수 없지만 제가 덕이 있는지 손님들이 항상 힘들 때 위로해 주고 어디 다녀오면 선물도 사다 준다"며 "며칠 전에는 손님 한 분이 머리 염색약을 사다 줬고, 애기 때 왔던 손님이 지금은 결혼해 부인과 자식을 데리고 가게에 온다"고 했다. 이어 "애기 때 별명을 지어준 손님이 서른 넘어 왔는데, 처음엔 못 알아봤다가 나중엔 누구인지 알고 까르르 웃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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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요릿집 ‘풍미’의 간짜장 한 그릇.
 조 씨의 아들 현수 씨는 명문대를 다니다 풍미를 지키기 위해 어머니의 손맛을 물려받았다. 4대째 이곳에서 영업을 하는 사장이 됐다. 현수 씨는 세 쌍둥이 아버지이기도 하다. 조 씨는 세 쌍둥이 중 한 명이 풍미를 이어받아 5대째 내려오는 가게로 만들고 싶어 한다.

 세 쌍둥이 할머니로서 조 씨는 아쉬운 점이 있다. 조 씨는 "화교인 우리가 이방인이라 아이들이 유치원 가도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고 교육비를 모두 줘야 해 부담이 만만치 않다"며 "또 장사하며 세금은 모두 내고 직원들 4대 보험도 다 들어주는데 우리는 혜택을 잘 받지 못해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현수 씨는 풍미에서 태어나 중화학교를 나왔다. 풍미 2층이 지금은 식당으로 쓰이고 있지만 현수 씨가 태어날 때는 가정집이었다. 현재 중국화교협회에서 일도 하고 있다.

 현수 씨와 조 씨는 직원들 복지에도 신경을 많이 쓴다. 이 때문에 8명 정도인 종업원이 오후 9시 이후에는 근무하지 않고 주 2일 이상 쉴 수 있게 스케줄을 짠다. 종업원들이 쉬는 날이면 현수 씨와 조 씨가 덩달아 바빠진다. 조 씨는 "지금은 제가 사장이 아니고 우리 아들이 사장인데, 종업원들이 더 힘들지 않게 제가 나와 도와주는 것"이라며 "근로시간 단축 때문에 종업원들 근무 강도나 이런 것들을 신경 쓰는 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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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시 중구 차이나타운에 위치한 중화요릿집 ‘풍미’.
 요즘 풍미는 트렌드에 맞춰 짜장면과 탕수육 위주로 코스를 만들어 판다. 탕수육은 가게 이름대로 풍미가 제대로다. 점심 때 직접 찾아가 보니 자리가 없어 식사를 못 할 정도였다. 조 씨는 옛 공화춘과 역사가 비슷한 풍미의 맛을 지켜 현수 씨의 자식에게 이어주고자 한다. 50년을 넘어 100년 넘은 노포(老鋪)를 바라본다.

이창호 기자 ych23@kihoilbo.co.kr

사진=이진우 기자 ljw@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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