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제를 지켰던 남한산성

 백제의 온조왕은 BC18년 백제를 세우고 하북위례성에 도읍했다. 동명의 사당을 짓고 천제를 드렸다.

 백제의 하남위례성은 남한산 밑에 자리잡았는데 ▶북쪽에는 한수(漢水·한강)가 띠를 두르고 ▶동쪽에는 숭산(崇山·검단산)이라는 높은 산 ▶남쪽에는 넓은 벌판(沃澤:南澤, 성남시 屯田동) ▶서쪽에는 넓은 바다(大海)가 있다는 기록을 보면 서울지역 중에서 한강 바로 아래에 이러한 지역은 하남시 고골 외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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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천왕사 목탑의 심초석. 백제·조선시대 기와. 천주명의 기와. <경기도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제공>
 특히 검단산의 검은 ‘곰, 감, 가미(神)’로 ‘신성한 제단이 있는 산’으로 온조, 다루왕, 구수왕, 책계왕, 분서왕, 비류왕, 아신왕, 전지왕 등이 이곳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드렸던 곳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검단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남한산성 남쪽의 검단산은 남단(南壇:현재 남문 옆에 남단사가 있음)으로, 「삼국사기」에는 남단에서 ‘천지(天地)’에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

 하남시 고골에는 남한산성 북문으로 이동하던 통로가 남아 있다. 그와 더불어 남한산성 성벽 안쪽과 벌봉 쪽에는 백제시대의 토성이 남아 있다.

 그리고 하남시 고골을 중심으로 금암산 쪽에는 덜미재, 널무늬 등에 옹로가 구축돼 있고, 객산 쪽에는 세미길, 막은데미, 홍두깨바람재 등에 옹로를 만들어 능선을 타고 남한산성 쪽으로 쳐들어오는 적을 막고 있다.

 남한산성 행궁 터에서는 1992년 하남시 교산동 토성 안에서 왕궁지가 발견된 이후 백제문화연구회 한종섭 회장, 오순제 교수 등이 백제시대의 토기를 발견했다.

 남한산성 행궁지 5차 조사에서는 백제시대 주거지와 8기에 이르는 수혈유구(구덩이 유적)가 확인됨으로써 남한산성이 백제시대에 이미 사용됐음을 알 수 있게 됐다.

 6차 발굴에서는 길이 53.5m(16칸), 폭 17.5m(6칸)의 대형 건물지가 발굴됐다. 이곳에서 나온 기와는 20㎏ 정도로, 조선시대의 기와가 4㎏인 데 비해 5배나 무겁고 대형이다. 이 건물을 통일신라시대라고 확정했는데, 경주에서는 이러한 기와가 출토된 적이 없다. 이 정도의 기와를 견디려면 벽체가 2m는 돼야 하는데, 이 건물의 용도를 무기고라고 한다.

# 삼국시대의 남한산성

 남한산성의 대형 건물지에서 천주명의 기와가 출토됐는데, 천주(天主)란 ‘하늘로부터 주권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당시 고구려의 평양성까지 쳐들어가서 고국원왕을 죽일 정도의 국력을 가졌기에 한강변에서 황제가 사용하는 황색 깃발을 펄럭이면서 군사 퍼레이드해 위용을 과시했다.

 이것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고구려가 ‘천하사방들은 이 나라와 이 고을이 가장 성스러움을 알라(天下四方知此國郡最聖)’고 천명한 것과 같다.

 조선 인조16년(1638)에 지은 사당인 숭열전은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모시고 있다. 뒷날 남한산성을 쌓을 당시 총책임자였고 병자호란(1636) 때 싸우다 전사한 이서의 위패를 함께 모셨다. 원래 건물 이름은 ‘온조왕사’였으나 정조19년(1795)에 왕이 ‘숭렬’이라는 현판을 내려 숭렬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성산성의 남쪽 성벽은 고구려식으로 축조돼 있고 몽촌토성에서는 고구려 토기가 출토됐으며, 용마산·망우산에는 고구려시대의 보루가 남아 있다.

 신라의 진흥왕은 백제의 성왕과 함께 함경도를 차지한 다음 553년 한강유역을 수복한 백제의 땅을 빼앗아 신주를 설치하고 김무력(김유신의 조부)을 군주로 삼았다.

 신라 문무왕13년(673)에 한산주에 성을 쌓고 이름을 주장성(晝長城)이라 했다. 그 후 757년에 북한산주로 갔다가 다시 568년에 남천주, 604년에 북한산주로 갔다가 다시 한산주가 됐다. 757년 한주 그리고 한산주가 됐고, 가장 넓은 지역을 가지고 있어서 남천정(이천), 골근내정(여주) 두 개의 군단이 배치됐다.

# 고려시대의 남한산성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 광주로 바뀌어 내려오고 있다. 광나루 또한 예전의 명칭은 한진(큰나루터)이었다. 한주의 치소는 하남시 고골이며 한산주는 남한산성, 북한산주는 북한산성(또는 아차산)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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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산성의 육합쌓기.
 이성산성의 보축부가 발굴됐고, 2016년 금암산에서 신라 석실묘와 석곽묘 등 6기의 고분을 1차적으로 확인했다. 이들 고분에서는 인화문평구병, 유개완, 청동경, 청동 숟가락, 철제 과대금구 등의 유물이 출토됐다.

 하남시 고골에 광주군의 치소가 있었기에 고읍이라고 칭하고 있다.

 태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한 후 최초의 불교 전래지였던 하남시 고골 지역의 천왕사를 중창하고 봉림산문의 원종국사를 주지로 모셔 왔다.

 천왕사에 있었던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대의 철불이 현재 국립박물관에 있다. 이곳의 진신사리는 공민왕 때에는 개경의 왕륜사로, 세종 당시에는 한양의 궁궐로 모셔졌다. 그리고 약정사, 신복선사, 선법사 등의 사찰들이 중창됐다.

# 조선시대의 남한산성

 신라 문무왕13년(673)에 한산주에 성을 쌓고 이름을 주장성이라 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일장산성이라 기록돼 있다. 백제 온조왕의 성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남한산성은 해발 482.6m의 청량산을 중심으로 북·남·서쪽은 높고 동쪽만 낮은 고로봉식 산성으로, 둘레가 총 12.4㎞(본성 8.9㎞, 외성 3.2㎞, 신남산성 0.2㎞), 높이는 7.3m로 자연석을 써 큰 돌을 아래로, 작은 돌을 위로 쌓았다.

 1624년 인조가 총융사 이서로 하여금 성을 개축하게 해 1626년 공사를 마쳤다. 4문과 16개 암문(봉암성 4개, 한봉성 1개), 성가퀴 1천897개, 옹성, 우물 80개, 45개의 샘, 창고 등의 시설을 갖췄으며 광주의 치소도 성 안으로 이전했다. 공사는 승려 각성이 8도의 승군을 동원해 진행했는데, 9개의 절을 지었다. 지금은 장경사만 남아 있다. 그 뒤 순조 때까지 여러 시설을 확장했다.

 남한산성의 수비는 총융청이 맡아 하다가 성이 완성되면서 수어청이 따로 설치됐다.

 현재 남아 있는 시설은 동·서·남문루와 장대·돈대·보 등의 방어시설, 비밀통로인 암문, 우물, 관아, 군사훈련시설 등이다. 1963년 사적 제57호로 지정됐고 201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본 내용은 오순제 한국고대사연구소 소장이 ‘광주문화’에 수록한 연구 결과 글을 바탕으로 작성된 것으로, 일반 학계의 주장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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