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답답한 시절이었다. 부평수출공단(부평국가산단)에 솟아 있는 수백·수천 개의 굴뚝들은 희뿌연 연기를 끊임없이 내뿜었다. 1990년대 주택가와 공업단지, 상업지역이 영문도 모른 채 마구 뒤섞인 인구 50만 명을 육박하는 부평(富平)의 하늘을 바라볼 때 드는 생각이다. 군부대와 대형 자동차공장, 총면적(32㎢)의 45%를 차지하는 고밀도 주택단지 틈에서 주차장과 공원·녹지는 태부족(太不足)이었다.
시험을 망친 중학생들과 대입을 앞둔 고등학생들이 부평평야의 드넓은 벌판이 남아 있었던 삼산동 일원으로 내달린 이유다. 황금빛 논두렁에 쌓여 있는 볏단에서 뒹굴고 나면 속이 후련해졌다. 그도 아니면 늘어진 수양버들이 아래 굽이굽이 휘몰아치는 청천천과 굴포천으로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한국전쟁 후 1960년대 ‘북구’로 불렸던 부평에는 인구 약 7만 명이 살고 있었다. 지금의 서구와 계양구를 분구하기 전 그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니 한 마을에 숟가락이 몇 개고, 대문 밖을 돌아다니는 ‘개똥이’가 누구 집 개인지도 서로 다 아는 정도였다. 초가집이 드문드문 있었고, 사방은 원통산·원적산·천마산·계양산 등에 둘러싸인 논과 밭 혹은 황무지였다. 원통천·산곡천·세월천·청천천·굴포천 등 자연하천과 우물이 많아 과연 ‘물의 도시’라고 할 만했으며, 동시에 광활한 분지 형태의 비옥한 곡창지대를 이루고 있었다. 다만, 홍수에 취약해서 물난리가 나면 주민들은 높은 지대로 피난을 갔고, 부평 벌판 한가운데로 뗏목이나 배가 다니기도 했다.
부평벌에 일제가 경인전철 7개 역사 중 하나를 계획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일제에 의해 경인전철은 1899년 개통됐고, 1900년대 초반 인천에서 서울역까지 가는 기찻길 시대가 열렸다. 일제는 부평을 식량보급기지로 수탈하려 했다. 이 일대 농토 1천400만여㎡를 가진 송모 씨가 친일 부역자로 나선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고려사에서 부평의 행정구역인 치소가 당초 계양산 이북쪽에서 이남쪽으로 넘어오는 역사와도 닮아 있다. 서북쪽으로는 외세의 침략을 방어하기 어려운 데다가 충청도 등지에서 올라온 보부상들이 개성(한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결국 부평평야를 가로지는 것이었다. 일제와 대지주의 극심한 수탈을 견디다 못해 보릿고개를 겪어야 했던 소작농들은 농사를 포기하거나 일제에 항거했고, 부평을 떠나기도 했다.
일제는 이후 이탈 농민을 흡수하고 징용 면제자 등을 끌어들이는 공업화 정책을 펴기로 했다. 1930년대 미·중 대륙 침략을 기획한 조선총독부의 의도였다. 일제는 부평에서 군수물자를 만들 공단을 세워 수천 명의 유휴 인력을 활용하고 그들을 흡수할 시가지 조성도 계획했다.
문제는 조병창의 역사가 일제의 패망과 함께 끝나지 않은 점이다. 일제는 세계대전에서 패하고 조선은 1945년 8월 광복을 맞았지만 이번에는 미군이 부평으로 들어와 조병창을 차지했다. 1945년 9월 8일의 일이다.
한편, 부평이라는 지명은 고려 충선왕2년(1310년)에 부평부라고 불려진 데서 비롯됐다. 고구려 470년에는 주부토군, 통일신라 757년에는 장제군, 고려시대에는 수주, 안남, 계양, 길주, 부평 등으로 바뀌었고, 1413년 조선시대에는 다시 부평으로 불렸다.
김종국 기자 kjk@kihoilbo.co.kr
사진=<부평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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