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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효성 국제펜클럽 인천부지부장
소멸로 끝나지 않고 절정으로 피어나는 죽음도 있다. 우리에게 디디에 세스테벤스라는 이름보다 한국 이름 지정환 신부님으로 더 익숙한 신부님의 영면 소식에 문득 든 생각이다. 선한 색감으로 물들인 인연이 우연이 아님을 말씀하신 신부님은 본인의 영결식에 노사연의 ‘만남’ 노래를 틀어달라고 하셨다. 벨기에 브뤼셀의 귀족 가문의 막내로 태어나 지구 반 바퀴를 돌아 한국 땅에 정착한 신부님은 그 당시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던 한국에 인연의 발걸음을 내디뎠다. 신부님이 부산항으로 입국한 1959년이면 우리는 전쟁의 상흔에서 힘겨워 할 때였다. 신부님을 임실치즈를 만든 주인공으로만 알고 있지만 빈곤한 사람들의 고통을 해결하고자 많은 일을 하셨다. 부안성당 주임신부로 계실 때는 농민들의 비참한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간척사업을 이끌어 99만여㎡의 간척지를 농민들에게 나눠줬다.

 간척사업에 몸을 혹사한 신부님은 담낭절제수술을 받고 벨기에에서 요양하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6개월 한국을 비운 사이에 간척지는 고리대금업자와 부자들 손에 넘어가고 없었다. 신부님은 절망하셔서 다시는 한국인의 경제적 향상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는데 농민들의 비루한 삶을 보는 것이 가슴 아파 맹세는 물거품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목축을 하기에 적합한 임실의 지형에 맞는 산양 키우기로 산양유를 생산해 팔았으나 판매가 신통치 않아 남아도는 산양유로 치즈를 만들기로 했다. 치즈 생산과 판로를 위한 궂은 일들이 실패를 거듭했지만 지역민을 위한 애정이 결국 신부님을 움직이게 한 원동력이 됐다. 신부님은 주민의 경제적 자립뿐만 아니라 복지재단 운영과 살 만한 세상을 위한 일에 혼신을 다하셨다. 신부님 영전에 바쳐진 국민훈장모란장은 희생과 봉사로 나눔을 실천하신 신부님을 위한 우리 국민의 진심이 담긴 성의다.

 지정환 신부님 장례미사가 있는 16일이 영롱해서 이 땅에 선함을 행하신 신부님 몇 분의 이야기가 오롯이 추억되는 날이다. 왕벚꽃나무의 자생지가 제주도임을 알리고 온주밀감나무 14그루로 제주도를 밀감나무 재배지로 만든 프랑스 출신 에밀 타케 신부님, 안성을 포도 재배단지로 이름나게 한 안토니오 공베르 신부님은 1901년에 미사주를 만들기 위한 머스캣 품종의 포도나무를 안성 구포동 성당에 심어 가꾸면서 안성 땅이 포도 재배에 적합한 곳이란 사실을 알아 포도나무 재배를 주민들에게 대대적으로 홍보해 안성 포도의 시조가 됐다. 이뿐만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젊은 인재 양성에 공을 들인 교육자로 애쓰신 외국인 성직자도 많아 감사하다.

 근래에 코카서스 3국을 다녀왔다. 기독교와 이슬람으로 이웃한 나라가 종교적 대립을 하고 있어서 정치적 대립이 국민적 대립으로 이어져 국경지대를 통과하는데 긴장감이 있었다. 종교의 이면까지 무조건 아름답다 말하기에는 약간의 모순이 존재한다. 하지만 결국은 이타심이 종교의 본질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해외여행을 하다 보면 가장 많이 방문하는 곳이 종교시설이다. 유서 깊은 종교 건물에는 명성에 걸맞은 휘황찬란한 장식이 위압적이라 저절로 몸을 낮추게 돼 주눅이 들기도 하고 성직자의 권위와 위엄을 장식하는 의상이며 장신구가 화려해 숙연해지기도 한다. 권위의 중심에 오르게 되면 우러름을 받고 싶고 더하여 무소불위의 힘을 과시하고 싶어지는 것 같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선하지 못한 일들이 불편하다. 사제의 품성을 헤아려 보게 되는 경우들이다.

 여행 중에 만난 소박한 성당은 몸을 낮추고 경배하라고 압박을 가하지 않아 오히려 방문객을 겸손하게 만들었다. 종교는 사람의 영혼을 어루만져주는 약손이라는 생각이 든다. 손을 내밀어 사람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사제가 진정한 성직자임을 알고 있지만 모든 성직자가 그렇다고 단정하기가 쉽지 않다. 지정환 신부님은 사람을 애틋해하는 마음으로 사셨다. 신과의 매개자 역할을 수행하는 중간자로 신부님의 영향은 섬세하고 따뜻해 사람들에게 선한 햇살이 됐다. 섬세한 선함은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애틋함에서 발현되는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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