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사장은 1951년 1·4후퇴 때 평양에서 부모님, 동생과 내려와 피란민촌(현 인하대학교 부지)에 자리잡았다. 먹을 게 없어 풀을 뜯어다가 허기를 채우곤 했다. 학익초등학교 3학년 때 부모님은 일거리가 부족해 서울로 이사했다. 서울살이도 녹록지 않았고, 창신초를 졸업한 뒤 바로 인천서중학교로 되돌아왔다.
송미옥의 창업주는 김 사장의 아버지인 고(故) 김종연 씨다. 김 사장이 중학교 3학년 시절 부모님은 평양에서 외식업 경험을 토대로 옛 인천제철(현대제철)을 설립하기 위해 들어온 독일 노동자들에게 식사를 전담하는 구내식당을 열었다. 2∼3년 뒤 독일인들이 돌아가자 김 사장 부모님은 동인천 중앙시장 인근(동구 화도진로 5번길 11-3)에 송미옥을 개업했다.
송미옥은 언제나 푸른 소나무처럼 항상 맛을 유지하겠다는 다짐으로 지어낸 이름이다. 초창기 송미옥은 경양식 집이었다. 인천제철에서 독일 노동자들의 식사를 맡았던 김 사장 부모님이 중앙시장에서 경양식을 팔자 가게를 찾는 손님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이때만 해도 정통 경양식을 하는 집이 몇 없었다.
김 사장은 "1950년대 후반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하는 그런 식당이 없어 손님이 많았다"며 "부모님 손 붙잡고 가게를 찾던 아이들이 지금 백발이 돼 찾아온다"고 웃었다.
김 사장은 "겨울철 손님이 더 많은 편이지만 여름철에도 꾸준히 손님들이 찾아 온다"며 "옛 맛과 정취가 그리워 오는 단골손님이 많아 항상 음식 맛과 가게 모습을 예전 그대로 지키고 있다"고 말했다.
김 사장은 "지금은 이렇게 벽과 천장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없다고 한다"며 "이 모습이 너무 좋아 그대로 유지하려고 벽과 천장, 바닥 관리를 철저히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송미옥의 대표 메뉴는 복 중탕이다. 복 매운탕과 복 맑은탕, 복 튀김, 복회 등은 복요릿집 어딜 가나 있다. 복 중탕은 복 매운탕과 맑은탕의 중간이다. 김 사장과 1973년 결혼해 곁을 지키는 그의 부인이 직접 담근 고추장과 된장을 써 국물 맛이 일품이다. 송미옥은 모두 자연산 생물 복만 쓰고 있다. 연평도와 동해바다에서 공수받아 쓰고 있다. 냉동을 쓸 수 있지만 맛을 지키기 위한 송미옥의 철학이다.
송미옥 옥상은 부인이 장독대로 쓰면서 장맛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 매년 겨울철 송미옥 옥상은 잔칫집 같이 시끌벅적하다. 김장과 장을 담그기 위해 김 사장의 가족이 모두 모인다. 딸 셋은 출가했지만 김장철에는 송미옥을 찾아 부모님을 돕는다. 600∼700포기의 김장을 할 때도 있었지만 요즘은 150∼200포기만 한다. 김치 소비가 많이 줄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송미옥 옆 건물에 살림집이 있지만 예전에는 3대가 송미옥 안에서 살 때도 있었다. 김장하는 날 송미옥 가족들은 오손도손 옛 이야기꽃을 피운다.
아들 상민(38)씨는 올해 초 복조리사 필기시험에 합격해 실기시험을 앞두고 있다. 아버지와 함께 송미옥에서 근무한 지 10년이 넘었다. 제대하고 졸업한 뒤 송미옥에서 사회생활을 배웠다. 3대째 가업을 이어 받은 상민 씨는 지난해 결혼했다. 김 사장은 상민 씨가 아이를 낳으면 4대째 송미옥을 이어가길 바라고 있다.
김 사장은 "다시 젊을 때로 돌아가도 송미옥을 지킬 생각이다"라며 "아들과 그 후손들이 송미옥 간판을 없애지 않고 쭉 이어가 송미옥을 추억하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맛과 추억을 되새겼으면 하는 바람이다"라고 했다. 이어 "93세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송미옥을 찾았던 배다리의 형제사 사장을 생각하면 오랜 시간 송미옥이 이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창호 기자 ych23@kihoilbo.co.kr
사진=이진우 기자 ljw@kihoilbo.co.kr
<자료=인천도시역사관 자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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