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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진영 대통령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 대변인
‘내셔널 미니멈(National minimum)’이라는 개념이 있다. 국가가 모든 국민에게 보장하는 가장 기본적인 생활여건, 모두가 누려야 할 최소한의 복지 수준을 일컫는 말이다. 1897년 영국 노동당, 페이비언 소사이어티에서 활동하던 비어트리스 웹 부부의 공저 「산업민주주의(Industrial Democracy)」에서 기원한 내셔널 미니멈은 1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주요 복지정책의 이론적 배경으로 사용되고 있다. 내셔널 미니멈이 국가의 책임을 말한다면, ‘시빌 미니멈(Civil minimum)’은 지방정부의 역할을 강조한다. 일본의 정치학자 마쓰시타 게이이치(松下圭一)가 주창한 시빌 미니멈은 사회보장, 사회자본, 사회보건의 영역에서 1970년대 이후 일본의 국가 기준까지 개혁하는 성과를 냈다고 평가받는다.

지난 4월, 정부는 ‘생활SOC 3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향후 3년간 총 48조 원 규모의 재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문재인정부가 말하는 ‘생활SOC’란 사람들이 먹고, 자고, 자녀를 키우고, 노인을 부양하고, 일하고 쉬는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인프라와 삶의 기본 전제가 되는 안전시설을 의미한다. 생활SOC 3개년 계획이 성공적으로 추진될 경우, 대부분의 지역 주민들이 체육관, 도서관 등 필수시설에 10분 내 접근이 가능해진다는 것이 국무조정실의 설명이다.

사실 여기까지만 들어보면 별로 재미가 없다. 그동안 정부 각 부처에서 지역에 지어주던 문화·복지시설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이야기다. 정부가 제시한 예산의 규모만 두드러질 뿐이다. 아니나 다를까 일부 비판적 언론에는 ‘총선용’, ‘선심성’이라는 단골 수식어가 또 등장했다. 하지만 한 꺼풀 들춰보면 문재인 정부의 생활SOC 정책에는 깊은 정치적 함의가 녹아 있다.

먼저 복합화다. 복합화는 전에 없던 ‘혁신과 포용’의 구현이다. 쉽게 이야기 하면, 지역이 필요로 하는 시설들을 곳곳에 산재시키지 않고 하나의 건물에 집어넣는 것이다. 표밭을 생각해 여기저기 시설을 나누던 구시대 정치공학적 접근을 배제하고 보면, 시설들을 한 공간에 복합화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고 실현 가능하다. 가장 눈에 띄는 효과가 부지확보 부담이 줄어 든다는 것이다. 사업비를 매칭하는 지방정부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어깨가 가벼워진다. 또 고령화와 지방소멸 시대에 주민 편의와 공동체 회복을 위해서라도 복합화가 필요한 지역이 많다. 문재인 정부는 지방정부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향후 3년간 한시적으로 복합화 시설에 대해서 국고보조율을 10%p 인상할 계획이다.

다음은 지역주도다. 문재인 정부 균형발전 정책의 핵심 키워드인 분권의 가치를 투영했다. 좌초되긴 했지만 헌법 개정안에도 분권의 강화를 천명했을 정도로 정부의 의지는 강력하다. 생활SOC 역시 모든 사업의 프로세스의 키를 지방정부가 쥐고 끌고 갈 수 있도록 설계했다. 서울에 앉아서 전국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기 어렵다. 아무래도 중앙정부 중심의 칸막이식 공급체계는 실제 소요와의 단절을 야기한다. 지방정부가 주민들과 함께 창의성을 발휘해 지역에 꼭 필요한 사업들을 취사선택해 계획을 수립하면, 중앙정부가 범정부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옳다. 특히 복합화 사업의 경우 국가균형발전위원회가 현재 시범실시하고 있는 지역발전 투자협약, 즉 계획 계약 방식의 확대 적용을 검토하고 있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계약을 맺어 사업을 진행하는, 국가재정의 ‘분권과 혁신’을 의미한다.

고장난명(孤掌難鳴)이라고 했다. 정치가 삶의 질을 높이려면, 생활SOC와 같은 생활밀착형 정책에 대해서는 손을 마주 쳐줘야 한다. 이미 문재인 정부는 우리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정치적 결단으로 생활SOC를 선택했다. 여당 역시 당정협의는 물론, 관련 토론회 등 적극적인 자세다. 이제는 지방정부와 야당이 나설 차례다. 내셔널 미니멈에 시빌 미니멈이 더해져야만, 실질적으로 지역 주민이 체감할 수 있는 삶의 질 향상이 일어날 수 있다. 3년 후 전국의 생활SOC복합화 시설에서 지역 주민의 박수소리가 울려 퍼지는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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