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 지니
정유정 / 은행나무 / 1만4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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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이 돌아왔다. 장편소설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로 제1회 세계청소년문학상을, 「내 심장을 쏴라」로 제5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한 후 「7년의 밤」, 「28」, 「종의 기원」 등을 연달아 펴내며 꾸준히 작품활동을 이어온 정유정 작가의 신작 「진이, 지니」가 출간됐다.

 ‘악의 3부작’이라고도 불리는 전작 「7년의 밤」, 「28」, 「종의 기원」이 인간 내면의 ‘어두운 숲’을 탐색하는 고도의 긴장감과 극한의 드라마를 그린 스릴러였다면 이번 작품은 완전히 새롭고 경쾌하고 자유롭다.

 갑작스러운 교통사고 직후 보노보 ‘지니’와 하나가 돼 버린 사육사 진이는 찰나의 인연으로 다시 만나게 된 청년 백수 민주와 거래를 하고 상황을 원점으로 돌려놓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야기는 가장 절박한 상황 앞에서 성장하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진정한 삶의 의미를 묻고, 진이(지니)와 민주의 시점을 넘나들며 시공간을 면밀하게 장악한다. 빈틈없는 자료 조사로 판타지마저 현실성 있게 그려 낸 촘촘한 플롯과 독자를 단박에 사로잡는 흡인력, 속도감 넘치는 스토리까지 작가 고유의 스타일은 건재하다.

 작가는 처음으로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판타지 장르를 차용해 이제껏 그녀가 선보여 온 것과는 확연히 다른 방식으로 소설을 풀어낸다. "어떤 장르든 가리지 않고 이야기에 적합한 방식이라면 가져다 쓴다"는 그의 말처럼 처음 시도해 보는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거침없고 과감하게, 하지만 그 누구보다 정교하고 부드럽게 상황과 인물을 매만진다.

 이야기는 진이와 민주의 입을 통해 전해지지만 두 사람을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것은 보노보 지니이다. 미완의 인간인 진이와 민주를 긴밀하게 연결하고, 서로에게 마음을 열게 하고, 그들을 좀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통로가 돼 준다. 진이와 민주가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를 어루만지고 성장의 동력으로 작동해 스스로 트라우마를 극복하게 하는 것이다.

 치열했던 삶의 끝자락에서 진이와 민주가 한 선택은 지니만을 위한 선택이 아닌 그들 자신을 위한 선택이기도 하다. 그렇게 진이와 지니, 민주를 둘러싼 관계들에서 번져 나오는 빛이 단비처럼 쏟아져 들어오며 따뜻하고 섬세한 작품이 탄생했다.

 판타지라는 장르적 재미를 덧입고 있으면서도 현실에 단단히 발붙이고 선 탄탄한 얼개와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입체적이고 매력적인 인물들. 「진이, 지니」는 빠른 호흡과 리듬감, 놀라운 흡인력으로 치밀하게 구축된 작가의 또 다른 세계다. 그 세계의 중심에 서 있는 보노보 ‘지니’와 사육사 ‘진이’, 그들을 통해 성장하는 ‘민주’까지 정유정의 이러한 변화는 어쩌면 이미 예견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단 사흘간 벌어지는 사건을 원고지 1천500매 분량의 장편으로 길게 풀어냈음에도 지루할 틈 없이 빠른 속도로 전개된다. 숨이 막힐 듯 치열한 마지막 순간을 담아내고 있지만 작품 전반에 깔려 있는 분위기는 오히려 경쾌하고 따뜻하다.

글의 품격
이기주 / 황소북스 / 1만4천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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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언어의 온도」로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기주 작가의 신작 인문 에세이다. 마음, 처음, 도장, 관찰, 절문, 오문, 여백 등 21개의 키워드를 통해 글과 인생과 품격에 대한 생각들을 풀어낸다. 고전과 현대를 오가는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작가 특유의 감성이 더해져 볼거리와 생각할 거리를 동시에 전한다.

작가는 이 책에서 말에 언품(言品)이 있듯 글에는 문격(文格)이 있다고 주장한다.

"사전을 찾아보면 ‘격(格)’은 주위 환경이나 형편에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분수나 품위다. 세상 모든 것에는 나름의 격이 있다. 격은 혼자서 인위적으로 쌓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삶의 흐름과 관계 속에서 자연스레 다듬어지는 것이다. 문장도 매한가지다. 품격 있는 문장은 제 깊이와 크기를 함부로 뽐내지 않는다. 그저 흐르는 세월에 실려 글을 읽는 사람의 삶 속으로 퍼져 나가거나 돌고 돌아 글을 쓴 사람의 삶으로 다시 배어들면서 스스로 깊어지고 또 넓어진다."

왕비, 궁궐 담장을 넘다
김진섭 / 지성사 / 3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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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조선 왕비에 대해 잘 알지 못할까. 사실 조선의 역대 왕비에 관한 기록 자체가 많지 않다. 게다가 왕비의 이름도 알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왕비의 부모와 직계의 세계를 수록한 「열성황후왕비세보」에는 왕비의 이름조차 싣지 않았다. 그저 어느 성씨의 누구누구의 딸이라는 식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이렇듯 정사에까지 왕비에 주목하지 않은 이유는 조선 사회가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한 철저한 가부장제 사회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 책에는 순탄하게 왕비의 자리에 오른 인물들은 물론 왕비의 자리에 올랐다가 쫓겨난 왕비들, 그리고 세자빈의 자리에 올랐지만 본인이 요절했거나 배우자인 세자가 요절해 끝내 왕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후에 왕비에 추존된 소혜왕후와 신정왕후 등 모두 44명의 왕비들이 소개돼 있다.

조선 27대 왕을 기준으로 해 1장 ‘조선 500년 역사의 뿌리가 되다’에는 1대 태조(이성계)에서 7대 세조(이유)까지, 2장 ‘행복과 불행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에는 8대 예종(이황)에서 14대 선조(이연)까지, 3장 ‘역사의 물꼬를 바꾸다’에는 15대 광해군(이혼)에서 21대 영조(이금)까지, 마지막 4장 ‘꺼져가는 불씨를 살리기 위해……’에는 22대 정조(이산)에서 27대 순종(이척)까지 왕의 정비와 계비를 소개하는 방식으로 구성됐다.

다양한 관점에서 서술한 왕비 이야기는 읽는 재미와 함께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도록 이끌어 준다. 왕비 단락 말미에 능을 안내하는 그림을 보면 한 번쯤 그곳에 들러 고인과 대화를 나누고픈 충동에 사로잡힐지도 모른다.

조현경 기자 cho@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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