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중 남성 전용 공간 ‘바버숍(barbershop)’은 다양한 연령대의 인기를 누린다. 바버숍은 우리말로 이발소(理髮所)다. 흔히 이용원(理容院), 이발관(理髮館), 이용소(理容所)라고 불리기도 했다. 바버숍은 남성들의 발걸음을 독촉한다. 옛것과 새것이 조화를 이루면서 진한 향수와 세련미가 뿜어져 나온다.
인천시 중구 내동에도 40여 년 전통성과 최신 트렌드를 갖춘 이발소가 있다. 이곳은 지금의 바버숍보다 뛰어난 인기를 누려 오고 있다. 바로 정점영(64)사장이 운영하는 ‘경기이용샾’이다.
그의 가게는 이발소와 같으면서도 다르다. 정 사장의 한 손에 가위가 쥐어지고 반대 손에 가위 끝이 닿아 손님 머리 위를 지나면 모난 곳에 각이 세워진다. 너저분하게 자란 잔디가 일정한 수평으로 잘려 나가는 듯 정교해진다. 그의 가위질 한 번은 묵은 때가 벗겨지는 느낌까지 준다. 손님들의 두상과 머릿결에 따라 각자의 스타일도 만들어진다.
그의 손을 거쳐 간 머리는 중독성이 강해 틈만 나면 찾게 만든다. 이런 이유로 정 사장의 단골은 20대부터 70대까지 폭이 넓다. 그가 외길을 고집하며 ‘가위손’으로 살아가는 신념이기도 하다.
당시 이발소는 꽤 벌이가 넉넉한 직업이었다. 세발사(머리 감기)로 시작해 함빠(유아·어린이 이발), 중함빠(중고생 이발), 주도(준직원), 면도사, 시야기(드라이 및 손질), 직원(이발사)까지 5∼7명이 단계별로 근무했다. 그는 주도까지만 가도 굶지 않을 것 같았다. 정 사장은 허드렛일을 하면서 2년 만에 시야기까지 올라섰다. 선배들의 눈치를 살피며 어깨 너머로 기술을 배우고 밤잠을 줄여 기술을 연마한 결과였다.
그는 1980년 중반 그동안 모은 돈으로 자신의 첫 가게인 ‘내동이발관’을 차렸다. 하지만 단골들의 권유로 지금의 위치로 이사하며 ‘경기이용샾’으로 간판을 바꿨다. 경기이용샾은 동인천역과 신포국제시장을 잇는 대로변에 자리잡아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경기이용샾이 199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하다. 당시 인천지역에서 유행하던 ‘잔디 스타일’과 ‘레옹 스타일’ 등도 경기이용샾에서 탄생했다. 짧은 머리지만 각자의 개성 있는 스타일을 찾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당시 인천지역 중·고등학교에서 조금 놀았다고 하는 학생들은 이곳으로 모였다. 군인이 휴가 나갈 때 군복에 주름을 잡고 군화에 광을 내듯 당시 중고생들은 이곳에서 멋을 냈다. 이곳에서 머리를 자르고 나올 때면 값비싼 명품을 걸쳐 입은 것처럼 남다른 자신감을 부여했다. 때문에 머리 한 번 자르겠다고 1층 밖에서부터 줄이 늘어섰다. 2시간 이상의 기다림은 당연했다. 같은 학교 친구들을 보고 새치기라도 할 때면 싸움까지 벌어졌다. 벌어진 싸움에 일부 일행이 우르르 밖으로 나가면 뒤에 기다리던 무리는 대기시간이 줄어 웃음을 짓기도 했다.
하지만 IMF 외환위기 이후 이런 광경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경기 침체와 동시에 중·고등학교에서 두발 자율화가 시행돼 자연스럽게 손님이 준 탓이다. 정 사장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발비(성인 기준)를 단 1천 원만 올려 1만 원을 받고 있다.
꾸준히 찾는 단골들의 모습도 변해 갔다. 20여 년 전 고등학생이던 단골들이 이제는 자식을 낳아 함께 온다. 말썽만 피우던 학생들이 지금은 대기업에도 취직해 찾아오기도 하고, 사장이 돼 오기도 한다. 수년 전부터는 오랜 단골들의 마지막 모습을 단장해 달라는 요청이 온다. 정 사장은 직접 찾아가 정성을 담아 그들과 작별인사를 나눈다.
정 사장은 "이용사라는 직업은 나의 숙명이다. 옛것만 고집하지 않고 항상 변화하려는 신념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며 "힘이 닿는 데까지 이용사로 활약하고 싶다"고 웃음을 지었다.
정점영 사장은 오늘도 변함없이 가위를 집어 든다.
이승훈 기자 hun@kihoilbo.co.kr
사진= 이진우 기자 ljw@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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