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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꽤 오랫동안 서점에서 스테디셀러로 팔리고 있는 「언어의 온도」라는 책에 회사의 경비 아저씨가 화단에 핀 꽃을 꺾으려는 직원에게 던진 말이 나옵니다.

 "꽃을 왜 꺾으려고 해요?"

 "사무실 책상에 올려놓고 보면 좋을 것 같아서요. 한 송이만 꺾어 갈게요."

 "그냥 오고가며 보도록 하세요."

 "네? 왜요?"

 "이 꽃은 여기 이 화단에 피어 있어서 예쁜 건지도 몰라요. 주변 풍경이 없다면 꽃의 아름다움은 반감될 거예요. 책상 위에 놓인 꽃은 지금 보는 이 꽃과 다를 겁니다."

 이 예화에 나오는 ‘꽃’을 ‘사람’으로 바꾸어보면, 사람도 두 종류의 사람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꺾는’ 사람과 ‘놔두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구분하고 나면, 철학자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소유 지향적’ 사람과 ‘존재 지향적‘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소유 지향적인 사람은 길가에 핀 꽃이 예쁘든 그렇지 않든 전혀 상관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내 것’이 돼야만 비로소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니까 ‘꺾어서’ 내 것이 돼야만 기뻐하고 만족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예쁜 것들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그러나 존재 지향적인 사람은 길가에 꽃이 피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기뻐하고 행복해합니다. 내 것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꽃이 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설렙니다. 함께하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꼭 내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하늘 아래 어느 곳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뻐합니다.

 꺾는 사람, 즉 소유 지향적인 사람은 ‘나의 이익’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존재는 나의 이익에 부합할 경우에만 비로소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즉, ‘나’는 주인이지만 ‘너’는 나의 성취를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한쪽은 성취감을 얻겠지만 다른 한쪽은 상실감에 아파합니다. 이렇게 둘 사이에는 불신과 원망과 갈등으로 점철됩니다.

 그러나 놔두는 사람, 즉 존재 지향적인 사람은 내가 주인인 것처럼 ‘너’도 주인으로 여깁니다. 내가 소중한 만큼 너도 소중한 존재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너’를 배려하게 됩니다. 이런 관계에서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습니다. 존경심과 깊은 신뢰감이 두 사람의 마음을 가득 채우게 됩니다.

 「지혜, 함께 가자」에 석가모니의 일화가 소개돼 있습니다. 석가가 제자와 함께 길을 걷다가 길가에 종이 한 장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제자에게 줍게 하고는 "그 종이는 본래 무엇을 한 것이더냐?" 하고 물었습니다.

 냄새를 맡아본 제자가 "좋은 향냄새가 나는 걸 보니 본래 향을 포장했던 종이 같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새끼줄 한 토막이 버려져 있는 걸 보고 석가가 또 묻습니다.

 "저 새끼줄은 원래 무엇을 묶었던 것이냐?"

 "썩은 생선을 묶었던 것인지 역겨운 비린내가 납니다."

 제자의 말이 끝나자 석가는 말했습니다. "모든 것은 원래 정결한 것이었다. 냄새가 나는 것은 모두가 인연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 그러므로 저 종이처럼 평소 향을 가까이 하면 향내가 나지만, 새끼줄처럼 생선을 묶었으면 비린내가 나는 법을 알아야 한다."

 앞에서 소개드린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소비 지향적인 삶과 존재 지향적인 삶은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이지 못한다고 합니다. 오직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물론 행복을 원한다면 존재 지향적인 삶의 태도를 따라야 하겠지요. 이런 태도가 자신의 삶을 지배하게 하려면 평상시의 삶이 중요할 겁니다. 석가의 가르침대로, 평상시에 어떤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 지금 내가 향내 나는 사람이 돼 있느냐, 아니면 비린내 나는 사람이 돼 있느냐, 혹은 ‘꺾는’ 사람이냐, 아니면 ‘놔두는’ 사람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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