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중국해에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필리핀에 군사거점을 구축하려는 미국의 계획이 차질을 빚을 것으로 전망된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마약과의 유혈전쟁'과 관련, 인권 문제로 대립하는 미국과의 군사 협력을 축소하며 24년 만에 미군의 필리핀 재주둔을 허용하는 협정의 폐기 가능성까지 경고한 데 따른 것이다.

3일 일간 필리핀스타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두테르테 대통령은 전날 한 행사장에서 미국과 필리핀 정부가 맺은 방위협력확대협정(EDCA)을 재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EDCA는 공식 문서이지만 필리핀 대통령이 서명하지 않았다"며 "내가 (미군에) 필리핀을 떠나도록 요구할 것이기 때문에 지금 (EDCA를) 재고하는 게 낫다"고 말했다.

EDCA는 베니그노 아키노 전 정부 때인 2014년 4월 볼테르 가즈민 필리핀 국방장관과 필립 골드버그 주필리핀 미국대사의 서명으로 체결됐다.

이 협정은 미국에 10년간 필리핀 군사기지 접근과 이용을 허용하고 미군 배치지역에 별도 시설물을 설치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필리핀 대법원이 올해 1월 양국 정부가 맺은 EDCA가 합헌이라고 결정해 미군이 합동군사훈련을 위한 단기 주둔에서 벗어나 중장기 주둔이 가능해졌다. 필리핀 상원이 1991년 미군 기지 조차기간 연장안을 부결해 1992년 미군이 필리핀에서 철수한 지 24년 만이다.

이 협정에 따라 아키노 전 정부는 남중국해를 마주 보는 팔라완 섬의 안토니오 바티스타 공군 기지를 비롯해 5개 군사기지를 미군에 제공하기로 했다.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인공섬 건설과 군사기지화를 견제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지난 6월 말 취임한 두테르테 대통령은 중국과의 관계 개선 의지를 밝히며 미국과 거리를 두고 있다.

그는 지난 11일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에서 이슬람 반군 소탕전에 투입되는 필리핀군의 교육과 훈련을 지원하는 미 특수부대의 철수를 요구한 데 이어 13일에는 미국과의 남중국해 합동 순찰에 더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28일에는 미국과 필리핀의 합동 군사훈련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필리핀 언론들은 마약 소탕방식을 인권 침해라고 비판하는 미국과 갈등을 빚는 두테르테 대통령이 EDCA 백지화 카드까지 꺼내들며 친중국 행보를 본격화하는 것으로 분석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미국인들이 나에게 화가 났다면 나 또한 당신들에게 화가 났다"며 미국에 대한 반감을 또다시 드러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오는 19일부터 이틀 또는 사흘간의 일정으로 중국을 방문,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등을 만나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해법과 경제협력 확대 방안을 논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향후 미국의 대응이 주목된다.

애슈턴 카터 미국 국방장관은 9월 말 하와이에서 열린 미·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국방장관 회의 직후 기자회견을 통해 미국과 필리핀의 굳건한 동맹이 이어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군사적 패권 확장을 저지하는 데 그동안 동남아 최대 우방으로 관계를 맺은 필리핀의 협력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보여준 것이다.

최근 페르펙토 야사이 필리핀 외무장관은 EDCA를 비롯한 미국과 맺은 협정이 그대로 이행될 것이라며 동맹 관계의 지속을 강조했지만 두테르테 대통령의 '반미' 행보로 관계 악화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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