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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역사적 의미와 개명(改名) 문제

이재석 인천대 교수/전 한국정치외교사학회장

2019년 02월 08일(금) 제11면
기호일보 webmaster@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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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석 인천대 교수
올해 2019년은 1919년 기미독립운동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조선왕조는 근대국가체제로 탈바꿈하지 못한 채 외세의 도전에 대처하는데 실패해 러·일전쟁 후 후발 제국주의 국가 일본에게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1910년 국권을 상실했다.

 그러나 외압에 비례해 민족 의식 또한 강화돼 한민족은 주권을 회복해 자주적인 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국권회복·독립 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2월 8일 동경 유학생들이 선구적으로 독립선언을 발표하고, 3월 1일에는 이념과 종교·지역을 넘어선 거족적 독립운동이 일어나 이후 국내외로 확산됐다.

 3·1운동은 자유주의, 민족주의, 비폭력 평화주의 이념에 입각한 독립운동으로 그 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했다.

 3·1운동 봉기 이틀 뒤 발간된 ‘조선독립신문’ 제2호는 ‘국민대회’란 절차를 거쳐 ‘공화정’ 체제의 ‘임시정부 수립’을 알렸고, 그 예고대로 1919년 3월 21일 러시아령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대한국민회의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당시 연락이 원활하지 못한 여건 때문에 그 뒤를 이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19년 4월 23일 서울에 한성 임시정부가 각각 수립됐으나, 이들 세 임시정부는 1919년 9월 6일 하나로 통합됐다.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주권재민(1조), 국민의 자유와 권리 보장(4조, 8조, 9조), 권력 분립(5조)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대한민국 임시헌법’을 1919년 9월 11일 공포했다.

 이후 임시정부에서 수차례 이뤄진 임시 헌법의 개정에도 불구하고 민주공화정이란 정체의 골격은 계속 유지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주도적 기구라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대한제국의 군주제와 결별하고 주권재민의 공화제를 채택한 정부라는 점에서 대한민국 건국사에서 큰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광복 후 1948년 5월 10일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로 구성된 제헌의회는 임시정부의 민주공화제 채택에 크게 힘입어 대한민국 정체(政體)를 민주공화제로 하는 헌법을 7월 17일 제정했고, 그 헌법에 따라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이로써 국민, 영토, 주권이란 국가 구성 요건을 충족시켰으므로 1919년 기미년 잉태한 한국이란 근대 국가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탄생해 대한민국 건국이 제도적으로 완결됐다.

 이처럼 근대 국가 한국의 탄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부터 거의 30년이란 긴 독립운동의 결과인데, 그 촉발제가 된 것은 기미년 2·8 독립선언, 기폭제가 된 것은 기미년 3·1 독립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3·1 운동은 중국과 인도, 인도차이나 지역 등 세계 약소 민족의 해방운동을 고무한 민족운동으로서 세계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민족의 독립운동과 건국에 기여한 선열을 현양하고, 유적지를 발굴해 사적으로 보전하고, 독립 운동과 건국의 역사를 연구해 기록하며, 매년 3·1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곤 한다.

 이런 종류의 일은 하나의 민족이 민족으로 정체성을 확인하는데 필수적인 사업이기 때문인데, 그런 사업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러나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처럼, 3·1운동의 역사적 의미가 지대하다고 하더라도 과도한 역사 해석과 의미부여 또한 경계해야 한다.

 최근 정치권에서 3·1운동 명칭을 ‘3·1혁명’으로 개명(改名)하자는 주장이 일고 있으나, ‘혁명’의 학문적 개념과 이론에 비추어 과연 ‘3·1 혁명’이란 이름이 적절한가에 대한 충분한 학문적 검토 후 신중하게 그 용어 사용 여부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혁명을 간단히 ‘정부나 체제를 전복하기 위해서 물리적 힘이 성공적으로 행사된 사건’이라고 정의한다고 하더라도, 혁명 개념 검토에는 정치 변동의 성패, 정치 변동이 추구하는 이상, 정치 변동을 실현시키는 수단, 정치 변동에 소요된 시간 등을 주요 요소의 분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학술 용어나 공식적 이름에서는 일상 언어 생활에서 비유적으로 쓸 때와 달리 ‘혁명’ 또는 ‘혁명적’이란 용어를 사용하는데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이름 짓기(命名)와 이름 바꾸기(改名)의 신중성은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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