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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 능행 길 따라 굽이굽이 ‘선조들의 숨결’ 물씬

5. 남한산성 옛길

2019년 04월 30일(화) 제14면
정진욱 기자 panic82@kihoilbo.co.kr

남한산성 옛길은 조선시대 후기 10대로 중 하나인 봉화로의 일부 노선으로, 서울과 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노선 중 하나였다.

봉화로의 일부 구간과 주변의 다양한 역사문화 자원들을 연결해 탄생시킨 것이 바로 남한산성 옛길이다.

남한산성 옛길은 조선시대 왕들이 여주의 영릉을 참배하러 갈 때, 보부상들이 보따리를 지고 인근 장터를 떠돌 때, 지방 선비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로 향할 때 지나던 길이었다. 이처럼 남한산성 옛길은 지난 시절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지금 남한산성 옛길은 우리에게 동서남북 4개의 특색 있는 길을 통해 선조들의 숨결을 느끼는 동시에 바쁜 일상생활 속 휴식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 왕들의 능행길, 민간의 상업루트

▲ 남한산성 옛길을 찾은 관광객들이 탐방로를 걷고 있다.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제공>
 남한산성이 위치한 지금의 성남시, 광주시, 하남시는 조선시대 행정구역으로 보면 모두 광주유수부의 관할 지역이었다. 광주유수부는 남한산성의 군사요충지적 특성 때문에 매우 중요한 행정중심지였다.

 또 남한산성은 왕의 이동과 관련이 깊다. 조선시대 왕들은 반드시 선대왕들의 능에 성묘를 가야 했으며, 왕들의 이런 성묘 행사를 능행이라고 불렀다. 후대 왕들이 영녕릉(英寧陵)에 참배를 하러 가려면 일 년에도 몇 차례씩 남한산성 옛길을 이용해 여주까지 가야 했다.

 남한산성 옛길의 또 다른 특징은 조선후기 상거래가 활발해지면서 필요해진 내륙의 유통망으로 민간에서 이용했던 상업루트였다는 점이다. 많은 보부상들이 남한산성 옛길을 통해 상업 유통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이렇게 이용된 남한산성 옛길은 목적지인 경상북도 봉화의 이름을 따 통칭 봉화로라고 불렸다.

# 검복리와 검북참

 남한산성 옛길이 지나는 남한산성 동문 밖에는 검복리라는 마을이 있다. 검복리는 해당 지역에 위치했던 검북참에서 지명이 유래했는데, 검북참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이용한 역참제에 의해 설치된 역참 중 하나이다. 역참이란 역과 참의 복합어로, 전통시대 교통과 통신을 담당하는 기관을 말한다. 검북참은 남한산성 옛길을 이용해 지방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도중 남한산성 행궁을 거치기 전 머물 수 있는 참이었다.

 일반인은 역참을 이용할 수 없었기에 사설 업소인 주막을 주로 이용했다. 그 때문에 조선후기에 주막이 빠르게 활성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검북참이 위치했던 검복리에도 이런 전통을 계승하듯 많은 식당들이 성업 중에 있다. 현재 검복리에서 역참과 주막은 사라졌지만 지나가던 길손을 맞던 장승만은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 한양 다음으로 컸던 완전한 소비도시, 산성리

 조선시대 한양은 20만 명이 넘는 인구를 가진 도시였다. 18세기 후반 산업혁명 시기 영국 런던의 인구가 5만 명이었다는 사실과 비교해 보면 가히 한양의 인구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남한산성 옛길이 위치한 산성리 지역은 한양에 인접한 소비도시였는데 토박이 주민의 제보에 따르면 산성 내 주민들이 주변 마을 사람들을 촌놈 취급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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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 옛길 노선
 1627년(인조 5년) 광주부의 읍치(邑治, 행정중심지)를 산성 내부로 옮기면서 산성리의 인구는 폭증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1895년 갑오경장 이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광주유수부가 폐지되고, 1914년 조선총독부에 의한 행정구역 통폐합까지 일어나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면서 그 규모가 서서히 줄어들게 된다.

 일제에 의해 산성 내에 위치하고 있던 광주군청이 경안동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군사도시·행정도시의 위용은 완전히 사라지고, 근대화 시기로 접어들며 주요 도로가 남한산성을 제외한 채 건설된다. 이후 한강이남에서 가장 번성했던 지역 중 하나였던 남한산성은 한적한 마을로 점차 변화하게 된다.

# 한강 남부 교역의 중심지, 남한산성 성내장

 남한산성은 거래할 물건을 운송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고지대이다. 동문과 남문을 제외한 북문과 서문은 길도 좁고 경사도가 매우 가파르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남한산성 장터는 특수성과 남한산성 옛길(봉화로)이 지나가는 중심지역이라는 조건 때문에 유명세를 떨쳐 왔다.

 중요한 도로망의 기착지이자 인구가 밀집된 지역은 어김없이 큰 장터가 서기 마련이었는데, 산성장(성내장)은 조선후기 한양 남부에서 송파장, 수원읍장 다음가는 장터였다. 수원읍장이 삼남대로의 중요한 장이었다면 성내장은 봉화로의 중요한 장터였던 셈이다.

 성내장에 우시장이 섰다는 점, 그리고 송파장에서도 팔지 않는 매우 독특한 거래 품목이 있었다는 점으로 미뤄 송파장의 배후 장시로 이용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주둔지와 관아가 있는 군사와 행정의 중심지에 위치한 장시였기 때문에 송파장에 필적할 정도의 큰 규모였을 것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정진욱 기자 panic82@kihoilbo.co.kr

 <자료=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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