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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와 장 모네

박제훈 인천대 동북아국제통상학부 교수

2019년 05월 22일(수) 제10면
기호일보 webmaster@kihoilbo.co.kr

박제훈 (인천대 동북아국제통상학부 교수).jpg
▲ 박제훈 인천대 동북아국제통상학부 교수
최근 슈테판 츠바이크의 「에라스무스 평전」을 읽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소설가이자 전기작가로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브라질 망명 생활 중 부인과 동반 자살한 비운의 문학가이다.

 영국에서 발행하는 주간지 Economist지에서 2016년 이후 브렉시트와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 당선으로 부상하는 신고립주의와 국가주의, 인종주의의 흐름을 걱정하는 서방의 지식인들이 츠바이크의 마지막 저서 「어제의 세계」를 많이 읽는다는 기사를 보고 처음으로 접한 작가이기도 하다.

 「어제의 세계」는 1, 2차 세계대전으로 무너진 이성과 낭만 그리고 희망의 서구세계를 어제의 세계라 칭하면서 그 평화의 서구문명이 어떻게 전쟁과 파괴 그리고 증오의 세상이 되었는지를 서술하고 있다.

 현재의 서구 지식인들에게는 지금이 마치 1차 세계대전 전 폭풍전야처럼 자칫하면 다시금 평화가 깨지고 갈등과 분열 그리고 증오의 시대로 접어들지 모른다는 점에서 많은 시사점을 얻는 것 같다.

 에라스무스 평전은 츠바이크가 쓴 많은 평전 중에서 대표적인 작품이다. 에라스무스 폰 로테르담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잇는 유럽의 대표적 인문주의자로서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서구문명의 기획자이다. 에라스무스가 있었기에 오늘날의 서구문명이 있을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와 로마문명을 토대로 이성과 그리스도교를 바탕으로 포용과 타협 그리고 개방으로 특징지워지는 유럽문명은 그를 빼놓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비록 동시대에 마틴 루터로 대변되는 종교개혁의 광기에 그의 이성과 타협의 정신은 패배하기는 했지만 17세기 이후 많은 후학들이 그의 인문주의 정신을 이어 근대의 계몽주의를 탄생시키게 된다. 츠바이크가 그의 평전을 쓰게 된 계기도 2차 세계대전 중의 유럽이 마치 종교개혁의 광기로 휩싸인 16세기와 흡사하다고 생각했고 전쟁의 광기에 저항하기 위해 에라스무스의 포용과 타협의 정신이 절실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학적으로 볼 때 에라스무스는 루터와 달리 "오로지 모든 것을 신의 은총에게만 맡긴다면 인간이 선을 행한다는 것이 인간에게 무슨 의미를 갖겠는가? 인간에게는 최소한 자유 의지의 환상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앙과 믿음에서의 광기 대신에 인간의지에 기초한 타협과 중용을 강조한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이성과 포용 정신이 지배하는 유럽을 꿈꿨지만 그의 꿈이 실현되기에는 20세기 프랑스의 장 모네가 등장하기를 기다려야 했다. 장 모네는 1950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를 기획하고 설립한 프랑스의 정치가로서 유럽 통합의 아버지라 불리는 사람이다. 그의 회고록을 보면 1부의 제목이 무력의 실패이고 2부의 제목이 통합의 시대이다.

 이 제목들이 상징하는 것은 장 모네 이전 유럽의 역사는 무력에 의한 정복과 통일의 시대였지만 결국은 다 실패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진정한 민주적인 방식에 의한 사람과 국가들 간의 자발적 통합이 시작됐다는 것으로 유럽통합을 통해 인류 역사 발전의 패러다임이 전환됐다는 의미이다. 츠바이크는 전쟁의 와중에 인류 문명의 붕괴를 목도하면서 좌절과 비관 속에서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했지만 전쟁 이후 유럽은 장 모네의 통합의 정신과 이상을 현실화시키는 타협의 정치력에 의해 유럽 통합이라는 오래된 에라스무스의 꿈을 실현시키게 됐다.

 오늘날 한반도와 동북아를 둘러싼 국제질서와 현실은 통합과 타협의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 2018년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으로 전쟁의 위기가 하루아침에 평화와 번영의 기회로 탈바꿈하는 듯 보였다. 지난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으로 한반도와 동북아는 다시금 불확실성의 시기로 접어들고 있다. 분열과 갈등이냐 평화와 통합이냐의 갈림길에 선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츠바이크처럼 비관주의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에라스무스처럼 관용과 포용의 정신을 강조하면서 한발 물러나 이성의 힘을 믿고 뒷날을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장 모네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통합의 정치 리더십을 기대할 것인가? 선택은 각자에게 달려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츠바이크의 비관주의의 길은 가지 않으련다. 교수로서 학자로서 에라스무스처럼 이성과 포용의 정신의 가치를 믿으면서 하루하루 작은 일에서 장 모네의 통합의 리더십을 배우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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