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3공화국의 혼분식 장려정책은 신신옥 인기에 큰 몫을 했다. 가난하고 배고프던 1960년대 당시 담배 한 갑 가격이었던 단돈 50원으로 맛볼 수 있었던 푸짐한 우동 한 그릇은 호주머니가 가벼운 이들에게 반가운 음식이었다. 고된 노동으로 땀을 흘린 후 고춧가루를 뿌린 얼큰한 우동 국물로 노곤함을 달래던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나 보다.
박관옥 사장은 인색함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종종 뻔뻔한 손님들도 기웃거렸다. 우동을 주문해 양껏 식사한 후 도망가는 무전취식자들이다. 직원들이 바빠 일일이 확인하지 못하는 것을 이용해 한 그릇 가격으로 두 그릇을 먹고 가는 수법을 쓰는 손님도 있다. 일부러 혼잡한 시간에 방문해 곱빼기 한 그릇을 주문해 다 먹어 놓고 본인은 방금 전에 식당에 들어왔다며 빈그릇을 치워 달라고 발뺌하는 식이다. 당장 식사비로 지불할 돈이 없어 시계나 양복을 맡기고 가는 일은 예사였다.
무전취식자들은 다음 날 천연덕스럽게 또 가게를 찾아와 우동을 주문했다. 아내와 직원들은 무전취식자들이 올 때마다 질색했지만 박관옥 사장은 오죽 배가 고프면 저러하겠나 하는 마음에 눈감아주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모두가 배고프던 시절이었기에 이제는 웃고 넘어갈 수 있는 추억거리가 됐다.
박진우 사장은 신신옥이 잘나가던 시절 영화는 원 없이 볼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하루종일 영화 필름을 교체해야 하는 극장 영사기사들이 배달 주문을 자주 해 배달부 형을 따라갔다가 영사실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는 식이다. 극장에서 영화 홍보 포스터를 붙여 달라고 요청하며 광고비로 주고 간 영화 할인권도 제법 쏠쏠했다. 인하전문대학에서 단체회식을 오는 대학생 형·누나들은 훗날 박 사장이 인하대학교 건축과에 입학하는 계기가 됐다.
1982년 신신옥은 갑작스럽게 닥쳐오는 인천의 개발 흐름을 버티지 못하고 폐업했다. 1960년대 만들어진 주안 5·6공단을 포함한 경인공업지역이 1970년대 산업화 바람을 타자 가게에서 일하던 직원들은 공장에 취업하기 위해 떠났다. 자동화된 우동 기계 없이 여러 사람이 달려들어서 면발을 뽑아내던 시절 직원들의 이탈은 가게 운영에 큰 타격을 줬다.
동인천 등 옛 상권이 쥐고 있던 중심시가지는 구월동, 주안동, 부평동 인근으로 넘어갔다. 1972년 새 동인천 지하상가를 시작으로 1974년 동인천 지하상가, 1977년 중앙로 지하상가, 1980년 인현 지하상가, 1983년 신포 지하상가까지 모두 5개 지하상가가 잇달아 생겨났다. 10년 가까이 이어진 공사기간 동안 불편한 교통 때문에 단골 손님들이 점차 줄어들었다. 유동인구가 지하상가를 중심으로 옮겨가 시장을 찾는 발길도 뜸해졌다. 1972년 인천지방법원과 검찰청이 석바위로 이전하고 인천이 직할시로 승격되던 1981년을 지나 1985년 인천시청이 구월동 청사로 이전했다. 동네가 변할 때마다 손님들도 빠져나가 경영난은 피할 수 없었다.
신신옥이 돌연 같은 자리에서 다시 문을 연 것은 20년이 지난 2001년이다. 신신옥의 재오픈은 당시 지역신문에 기사로 소개될 정도로 화제였다. 2000년 IMF의 타격을 이겨 내지 못하고 건축설계사무소 일을 그만둔 박진우 사장이 주변 사람들의 응원과 권유로 가게를 이어받을 결심을 한 것이다. 아버지 박관우 사장에게 우동 조리법을 전수받아 운영하고 있으며, 신포국제시장을 떠나 인천 각지에 흩어졌던 단골손님들이 소식을 듣고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는 현재까지 이어져 지역민과 실향민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을 생각나게 하는 신포국제시장의 명소가 됐다.
박진우 사장은 "튀김우동 같은 옛날 음식을 현대인들이 다시 찾아와 먹어 줄까 의구심이 들었는데 주변 사람들의 용기로 신신옥이 재탄생할 수 있었다. 자식들이 아니더라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내 가게를 물려줄 생각이다. 내가 전통을 이은 것처럼 누군가가 꾸준히 이어주고, 이런 우동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기억해 준다면 자부심을 느낄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유리 기자 kyr@kihoilbo.co.kr
사진=이진우 기자 ljw@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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